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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은 무대디자이너의 Slow Step






“스케일을 알거나 그런 건 아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큰 걸 작게 만드는 것에 흥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지나간 모든 일이 바로 지금의 나를 위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최영은 무대디자이너는 학창시절부터 손으로 만지고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딱히 미술을 전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만난 것이 어떤 것이었느냐에 따라 그의 손재주는 다르게 쓰였을 지도 모른다. 아마도 건축가나 요리사처럼.


뜻밖에도 그가 만난 것이 연극이었다. “여고를 다녔는데 배우가 되고 싶어 했던 친구가 있었거든요. 친구가 연극반에 들어간다고 하고, 재밌을 것 같아서 저도 들어갔어요. 결국 그 친구는 안 남고 저만 남았죠. (웃음)”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 곁에 있다가 우연히 그 세계에 발을 딛는 경험. 최영은 디자이너는 무대라는 세상과 이렇게 만났다. “학교에서 <리투아니아>라는 작품을 한 적이 있어요. 연기와 무대디자인을 같이 한 작품이었는데, 세트라고 해봤자 무대에 계단 하나 있는 정도였거든요. 그런데 그 작품을 하면서 굉장히 행복하더라고요. 왜 그랬나 생각해보면 그 계단 하나로도 내가 무대 위에 있는 느낌을 받아서였던 것 같아요.” 무대공포증이 무대와의 거리를 멀어지게 한 것이었다면, 공간으로서 무대를 지키는 무대디자인은 최영은 디자이너가 무대에 남도록 하는 힘이었던 셈이다.


어렴풋했던 10대의 경험은 최영은 디자이너를 무대미술로 이끌고, 다양한 어시스턴트 경험은 아티스트로서의 자신을 알아가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외부작업은 여신동 디자이너의 어시스턴트로 처음 시작했어요. 보통은 한 디자이너와 오랫동안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정승호, 김희수, 오필영 디자이너의 어시스턴트를 하면서 다양한 작품을 경험했어요.” 하지만 무대디자인과 소품디자인의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 짓기 어려운 소극장 뮤지컬 시장의 한계는 그를 무대디자이너가 아닌 소품디자이너로 먼저 데뷔하게 했다. 2009년 뮤지컬 <쓰릴 미>에서였다. “소품의 경우는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유지보수가 쉽지 않아요. 특히 <쓰릴 미>는 전화기 수배하는 일을 많이 했죠. (웃음)”






소품디자인의 경험이 무대디자인의 영역으로 옮겨가고, 자신만의 무대를 찾아가던 중 최영은 디자이너는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를 만난다. “마이클 존 라키우사의 작품은 뮤지컬 <씨 왓 아이 워너 씨> 이후 두 번째였는데 <베르나르다 알바>는 또 다른 느낌이었어요. 음악이 너무 좋길래 얼른 텍스트를 봤죠. 텍스트 좋은 작품을 좋아하긴 하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았어요.” 젠더감수성이 높아지던 2018년, <베르나르다 알바>는 드물게도 10명의 배우 모두를 여성으로 채워 시작 전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은 작품이었다. 화제성을 입고 공개된 작품은 무대 위와 밖의 모두가 하나의 정서를 갖고 가열차게 달리는 완성도로 더욱 화제를 모았다.  


거대하고 단단한 문과 몇 개의 의자는 폭압으로 가득한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단박에 설명해냈다. 문틈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는 강렬한 붉은 빛과 검은 상복 안에 덧대어진 붉은 천의 의상은 고립된 여성들이 뜨겁게 간직해온 모든 것을 상징했다. “크리에이터 회의에서 <베르나르다 알바>는 ‘억압이 대물림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는 정서가 공유됐어요. 표현하는 방법을 찾되 뭔가가 많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싶어 무대에는 큰 문, 샹들리에, 의자만 놓기로 했어요. 배우들이 온전히 표현할 수 있도록. 보통은 스케치를 하고 모형을 만드는데, 이 작품은 갑자기 모형을 만들게 되더라고요. 구조가 먼저 떠올랐고 이것저것 붙여보고 떼어가면서 디테일을 잡아갔죠.” 그 결과 <베르나르다 알바>는 제3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무대예술상을 비롯해 총 6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4개의 트로피를 받았다. “크리에이터들끼리의 협업이 잘 된 작품이었는데, 배우들이 상도 받고 작품상도 받게 돼서 정말 행복했어요. 제가 디자인한 무대가 <신과 함께 저승편>, <웃는 남자>와 같이 후보에 올랐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좋았고요.”






최영은 디자이너가 노미네이트만으로도 즐거워한 데는 자신의 결심이 틀리지 않았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무대디자인을 한 지 얼마 안 됐을 때만 해도 제가 상업뮤지컬을 선호하고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나는 규모가 작더라도 내가 오랫동안 붙잡고 있을 수 있는 작업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 발견의 중심에는 우란문화재단이 있다. 최영은 디자이너는 2015년 <씨 왓 아이 워너 씨>로 우란문화재단과 인연을 맺은 후 <베르나르다 알바>, <네이처 오브 포겟팅>, <멜리에스 일루션: 달에 도착>에 참여하였으며, 앞으로도 2편의 작품에서 새로운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도면을 그리고 모형을 만들어도 실제 무대를 눈으로 보는 건 극장에 셋업이 시작되면서부터거든요. 보통 대극장 뮤지컬이 셋업에 2주의 시간을 들인다면, 소극장은 1주일이에요. 무대 셋업과 리허설까지 이 시간 내에 다 해내야 되죠. 그런데 여기는 3주를 줘요.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여유와 생각할 시간을 주는 거예요.”


무형의 무언가가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까지는 물리적인 시간이 꽤 많이 필요하다. 최영은 디자이너 역시 자신에게 온전히 주어지는 시간을 통해 오롯이 작품에 몰입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더 좋은 작품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현실적인 조건 때문에 작업도 끊임없이 한 것 같아요. 근데 그게 독이 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리고 아이가 29개월이 됐는데 이 아이의 예쁜 순간도 엄마로서 놓치고 싶지 않아요.” 그는 크리에이터들의 생각을 모아 하나의 작품으로 표현해내는 이 과정을 사랑하고, 자신이 모르는 새로운 것을 극장에서 경험하기를 바란다. 명확하게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어떤 것이 관객에게 전달되도록. 최영은 디자이너가 느린 걸음을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글: 장경진

사진: 황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