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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기 전부터 궁금했던 건 그녀의 손이다. 잦은 가위질과 바느질에 무뎌진 손일까, 아니면 손끝의 감각만으로 옷감의 감촉과 색감을 알아챌 만큼 예민한 손일까. 하지만 정작 마주한 그녀의 손에서 눈길을 끈 것은 맨질한 손톱의 반을 물들인 까만 매니큐어였다. 군데군데 큐빅도 박혀있던 그 손끝이 그녀가 입은 파란색 스프라이트 원피스, 그리고 파란색 구두와 참 잘 어우러졌다. 그 파란색 잔상은 인터뷰가 끝난 후에도 종종 그녀를 떠올리게 했다. 무대의상디자이너 도연은 그런 사람이다. 어떤 캐릭터든 그 캐릭터에 어울리는 색을 반드시 찾아내어 옷을 만든다. 그리고 그 옷은 무대를 특별하게 물들인다.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공연에서 오직 그 무대만의 색을 찾아내고, 다채로운 색깔의 의상으로 무대 위 캐릭터에 숨을 불어넣는 것이다. 그렇게 한 작품의 의상을 완성해 무대에 올리기까지 비록 어마어마한 노동이 필요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지 이 일만큼 재미난 무언가, 이 일보다 매력적인 무언가를 찾지 못했단다. 패션디자인처럼 디자이너가 돋보이는 옷을 만드는 것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재밌다는 걸까. 무지한 시선으로 던진 질문에 그녀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옷에 이야기를 담다
천직이라는 말이 있다. 어느 한군데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의상디자이너 도연에게 무대의상디자이너라는 직업이 그렇다. 매번 다른 작품, 다른 이야기, 다른 캐릭터를 만나고, 똑같은 작품일지라도 연출이 누군지, 배우가 누군지, 시대극인지, 현대극인지에 따라 다른 옷을 만들어야 하니 늘 새로울 수밖에.
처음엔 그녀도 패션디자인을 공부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오빠가 있는 뉴질랜드에 놀러 갔다가 그곳에 무작정 눌러앉았던 당찬 그녀에게 우연히 들었던 패션디자인 수업은 새로운 꿈이 되었다. 패션디자인 전공으로 대학을 가고, 패션의 메카 파리로 떠나 더 넓은 곳에서 공부를 이어나갈 만큼 재밌었다. 하지만 재밌는 일과 적성에 맞는 일은 달랐다. 졸업 후, 브랜드 화보 촬영과 유명 디자이너들의 패션쇼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하면서 유행에 민감하고, 쇼가 중요한 패션디자인은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는다는 걸 느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교수님의 추천으로 맡게 된 어느 작은 2인극 무대의 의상디자인은 그녀의 인생을 다시 한 번 바꿔놓았다. 작품과 캐릭터를 분석하고, 직접 공들여 옷을 만드는 힘든 과정을 거쳐, 그 옷을 입은 배우들이 무대 위에 올랐을 때 느껴지는 그 쾌감, 희열. 그녀는 그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에 무대의상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자면 ‘다시 미쳐서’였다. 그녀가 끌렸던 것은 아마도 자신이 만든 옷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캐릭터의 이야기, 작품의 성격과 연출의 의도, 그리고 옷을 만드는 나 자신의 이야기.
이야기를 색으로 말하다
옷으로 이야기하는 그녀만의 방식은 바로 색감이다. 같은 빨강이라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 누가 입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기분이 어떤지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 때문에 색깔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래서 캐릭터의 성격과 심리, 기분을 표현할 수 있는 색을 찾는 과정은 무대의상디자이너 도연이 옷을 만들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녀를 가장 즐겁게 만들어주는 작업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작업한 작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도 ‘색’이 잘 나온 작품이다. 바로 우란문화재단의 시야 스튜디오 개발작으로 백석 시인의 이야기를 그렸던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공연의상을 준비하면서 백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여러 권 읽었는데, 그때 떠오른 색이 바로 ‘녹색’이었다. 보통 모던보이, 하면 화이트 정장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어쩐지 녹색이 자꾸 떠올랐다. 어떻게 보면 남자배우에게 입힐 의상의 색으로는 파격적인 색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의상은 진짜 백석이 살아 돌아온 듯 무대에 그 숨결을 불어넣었다. 후에 실제로 백석이 녹색을 즐겨 입었다는 이야기를 듣고선 더욱 만족스러웠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우란문화재단의 시야 스튜디오 프로그램에서 진행하는 거의 모든 작품에 참여했다. 2015년 뮤지컬 <52blue>부터 시작해 올해 초 연극 <요정의 왕> 등 트라이아웃 공연의 모든 의상을 제작했다. 작품을 함께 만들어나가는 프로그램 특성상, 일반 상업공연에 비해 창작진의 한 사람으로서 자기 생각과 아이디어를 좀 더 적극적으로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틀린 답이어도 괜찮을 수 있다. 그걸 아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일 테니.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
무대의상디자이너 도연이 옷에 담는 이야기는 그녀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연출과 배우, 조명과 의상 등 모든 분야의 크리에이터들이 다 함께 만들어가는 '우리'의 이야기다. 함께 하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어줄 관객.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녀를 더 열정적으로 만든다. 옷감에 땡땡이 무늬를 일일이 그리고, 직접 손으로 단추 500개를 달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렇게 만든 옷을 배우에게 입히고, 첫 공연의 막이 오르는 걸 지켜볼 때면 그녀는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린다. 자신이 만든 옷이 무대와 캐릭터, 작품의 이야기와 호흡하며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것을 확인했을 때 그 감정의 울림. 그것은 무대의상디자이너 도연만의 헤로인이자 스스로에게 건네는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그녀는 이야기를 담아 옷을 짓는다. 어느 날 문득 그녀가 만든 옷, 함께한 무대가 관객에게 잔상으로 남아 그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기를 바라면서 지친 몸을 다독여 또다시 다른 작품, 다른 무대의 이야기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런 그녀이기에 우리는 기꺼이 그 무대의 관객이 되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