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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름 연출가의 To Reason




치열한 고민, 그리고 선택. 그것은 결국 더 나은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그 무수한 고민과 선택의 과정이 어찌 쉬우랴. 최선의 선택을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또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런데 그 과정이 행복하다는 사람이 있다. 공연에 대한 열정 하나로 뜨겁게 타오르는 연출가 한아름이다. 끊임없는 사유는 그를 성장시키는 토대이자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자신의 한계를 깨기 위해, 그리고 스스로를 더 똑바로 보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나 역시 그의 고민 속으로 빠지고 만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를 잘 아는가?’. 가장 원초적인 질문이지만 동시에 가장 답하기 어려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계속해서 갈구해 온 그의 지난날이 인터뷰 내내 눈앞에 그려졌다.



빠져들다


아주 평범하고 사소하지만 잊을 수 없는, 시간이 흘러도 기억 속에 또렷이 살아있는 인생의 한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 속에도 그런 순간이 있다. 원래부터 음악과 미술, 그리고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고 입을 뗀 그는 기억을 더듬어 고등학교 2학년 때를 회상했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수행평가로 연극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어요. 그때 제가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되어 있었는데, 저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요.” 불가능. 그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이었다. 18살의 그는 연극이 무엇인지, 연출이 무엇인지 몰랐다. 해낼 것이라는 자신감조차 없었다. 그러나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힘이 ‘도전’ 아니던가. 그는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무대에서 이야기 속의 많은 인물을 만났어요. 그들로 하여금 ‘이 사람은 나쁘지만 이런 의도가 있었구나’, ‘이 사람은 이렇게 고난을 해결하는구나’ 하는 것들을 깨달았죠. 신기하게도 그런 일련의 경험이 저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이해하게 만들더라고요. 스스로 자신감도 생겼고요.” 그는 ‘행복한 경험’이었다고 표현했다. 고작 8분짜리 공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연극일지도 모르지만, 그에게는 영원히 간직될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다.


Amor Fati. 네 운명(運命)을 사랑하라. 어쩌면 지금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연출가로서의 삶은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연극에 대한 18살의 첫 경험 이후, 그가 본격적으로 연출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대학교 선배인 이대웅 연출가 때문이었다. “대학교 졸업 후 잠시 연극 활동을 쉬고 있던 저에게 ‘재밌는 걸 할 거야. 같이 해보자’라며 손을 내밀었어요. 여기에 작가이자 연출가인 옴브레가 함께 해 ‘프로젝트 만물상’이 탄생했죠. ‘프로젝트 만물상’은 제게 은인이자 동료이자 자극제, 그리고 원동력이에요. 서로 첨예한 질문을 해서 나도 알지 못했던 내 모습을 조망해 주기도 하고, 제한적인 상황에서 생각을 발현하지 못할 때 옆에서 도와주기도 하죠. 서로 취향이나 원하는 바도 비슷해요. 그렇지만 가는 길과 그 목적은 너무 달라요. 그래서 같이 있으면 ‘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면서 많이 느끼고, 배워요.” 이것을 운명이 아니고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의 모든 시작에는 ‘프로젝트 만물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정체성 그 자체이기도 하다. 만물상과 함께할 때, 온전한 ‘나’, 한아름을 마주할 수 있다. ‘연출’은 그저 나를 표현하는 수단일 뿐이다. 연출가 한아름이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게 된 것도 결국 그의 숙명(宿命)이 아니었을까.





성장하다


조연출에서 연출로 가고 싶은 욕구가 커질 때 즈음 우란문화재단의 ‘시야 플랫폼: 연출워크숍’에 참여하게 됐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창작진과 함께한 워크숍은 그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를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되기도 했다. “짧은 시간 안에, 조연출이 아닌 연출로서 장면을 만들어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텍스트에 대한 이해보다 그림에 대한 설명, 내가 설명한 그림을 구현하는 데 시간을 많이 소비했죠.” 마지막 구현 단계를 마쳤을 때, 작가의 궁금증에서 비롯된 질문이 던져졌다.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며, 그는 비로소 연출이라는 말에 대한 자신의 오해를 깨달았다. 글을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존중이라 생각하고, 나의 경험과 나의 시각에 집중했던 지난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제야 연출가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어떻게 작품을 대해야 하는지 본질적인 고민을 해보게 되더라고요. 구현화 하는 과정에서의 제 태도에 관해 생각해 볼 수도 있었고요.” 진정한 연출가로서 한 뼘 더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는 지금 연출가로서의 완벽한 도약을 꿈꾸고 있다. 그래서 올해는 연출 위주로 작업 활동을 진행했다. 조연출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우란문화재단에서 최근 진행했던 뮤지컬 <일 테노레> 낭독회에서 조연출로서의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연출워크숍이 인연이 되었어요. 작가님께서 워크숍을 계기로 저를 알고 계셨고, 그래서 저에게 먼저 작업을 제안해 주셨죠.” 그의 말마따나 첫 시작은 ‘제안’이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그가 추구하는 방향과 잘 맞았기에 그도 이 작품을 선택했다. 망설임은 없었다. “1차 창작이 ‘대본화’라면 2차 창작은 ‘구현화’라고 생각해요. 그 경계를 경험하고 싶었죠. 대본을 무시하고 해석적으로만 접근하면 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가는 실수를 저지르게 되거든요. 이번 <일 테노레>는 본 공연이 아닌 ‘낭독회’였어요. 그래서 작가님이 드라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최대의 구현을 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와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죠. 거기에서 구현 방법과 의도를 파악하는 방법, 그리고 의도로 가기 위한 작업자의 태도를 배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좋은 경험의 기회를 놓칠 수 있나요.”



사유하다


멈추지 않는 조연출과 연출로서의 도전은 그를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든다. 빼곡하게 적힌 그의 수첩 곳곳에서 그 ‘고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고민의 목적은 무엇일까. “예전에는 나 자신이 즐거운 게 우선이었어요. 근데 최근에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연출가의 진정한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연출은 개인의 영역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많이 고민하죠.” 연출은 협의해야 하는 순간의 연속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많은 고민이 이루어진다. 주로 자신의 말과 선택의 양면에 대해서다. ‘지금 나의 의견은 연출가로서 인가?’, ‘개인적인 합리화는 아닌가?’, ‘나의 우유부단함을 포장하는 말은 아닌가?’, ‘연출가로서 무책임한 선택은 아닌가?’ 그렇게 계속해서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선택은 언제나 결과를 불러온다. 최선의 결과를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이어지는 고민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고민의 과정이 고되지 않단다. 의아했다. 그러나 곧이어 그가 내놓은 명쾌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공연을 하면 다 사라져요. 기회비용이라고 해야 할까요? 고민 끝에 값진 경험을 얻죠.” 공연이 끝난 후 관객과 너와 나, ‘우리’가 됐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때는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다. 어떠한 두려움도 없어진다. 치열한 고민의 결과다. 수많은 고민과 선택의 순간을 머금고 태어난 작품이 누군가와 소통을 이루어 냈을 때. 그 희열을 이루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이 그의 열정을 끝없이 불타오르게 만든다.





인터뷰를 시작하기에 앞서 자기소개를 부탁하자 그는 ‘어렵다’라는 대답을 먼저 내놓았었다. 대화를 마친 후에 마침내 그의 말이 이해가 갔다. 그의 말이 맞다. 어떻게 ‘나’를 하나의 단어로, 하나의 문장으로 규정할 수 있겠는가. 그를 무언가로 규정하지 않기로 했다. 규정한다는 것은 결국 한계를 만들어 버리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