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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터그 이단비의 From the Border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자리를 막론하고 답하기 쉬운 요청은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문장이니까. 이단비 드라마터그는 간단하고 명료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이단비. 주로 하는 일은 번역과 드라마투르기 입니다.’ 준비된 답이었을 테지만, 단순히 외워서한 말로 들리지는 않았다. 꾸밈 많은 문장도 아니었는데, 확신에 찬 목소리 덕에 화려한 문장보다 훨씬 당당하고 멋진 대답이 됐다. 그런데 사실 그가 드라마터그로 활동하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부터다. 이렇게 급속도로 드라마트루기 작업에 빠져들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자기소개 앞에 당당할 수 있었던 비밀을 들어보았다. 



경계에서


처음부터 당당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 많은 사람이었다. 독일에서 나고, 10년동안 자랐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독일과 한국 문화 사이의 경계에 살고 있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웠다. 외모는 완벽히 한국사람인데 한국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지는 못하고, 독일에서는 외국인으로 치부 받았다. 경계에 서는 것이 그녀의 필연이었을까. 드라마터그로서의 이단비는 지금 또 다른 경계에 서있다. 


“(드라마터그는) 공연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섞이지는 못해요. 하지만 외부자도 아니죠. 경계에 서 있다는 생각 때문에 고민이 많았는데 지금은 조금 해결이 됐어요. 독일에서 반 년 정도 레지던시를 할 기회를 얻었는데, "드라마터그의 본 고장에서도 이런 고민이 있을까’ 알아보고 싶었어요. 경험 해보니 경계에 있다는 건 양쪽을 알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더라고요. 양쪽을 본다는 건 새로운 시선으로 볼 수 있다는 거니까 결국 장점이었던거죠. 작품 안에도 들어갈 수 있고 밖에서 객관적으로도 볼 수 있고. 그게 드라마터그의 중요한 역할이기도 하고요” 


양쪽에 모두 동화되고 인정받고자 하는 무리한 미련에 삼켜지는 대신, 그녀는 ‘경계란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시선을 옮길 수 있게 되었다. 경계에 닿은 발끝에서, 경계로부터 펼쳐지는 세상으로.






인사이더


드라마터그라는 직업에 대해 조금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다들 물어봐요. 무슨 일을 하는 직업이냐고요. 아직 많이 낯선 개념이니까요. 크게 2가지 정도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극장을 운영하는 우리나라 극장에서의 PD개념의 역할과, 프로덕션에 관여하는 프로덕션 드라마터그 역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프로덕션 드라마터그의 역할을 주로 해요. 저도 그렇고요. 제 경우에는 연출가의 조언자가 되거나, 작품의 캐릭터를 지정하는 데에도 의견을 제시하는 조금 더 적극적인 개입을 하기도 해요. 또는 텍스트 자체를 만드는 아주 드문 경우도 있었어요.” 


우란문화재단과 처음 작업했던 연극 <집에 사는 몬스터>때 그는 보다 적극적인 드라마투르기를 보여주었다. “임지민 연출이 명확한 콘셉트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강요하지 않는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어서 서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죠. 임지민 연출에게 작품 하나를 읽어보라고 소개해주었는데, 그게 이 공연의 원작이 되었어요. 그래서인지 이 작품 하면서 공연 처음 시작했을 때의 설렘을 느끼기도 했어요. 작품의 출발점에 서서 더  많은 관여를 할 수 있었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일종의 창작이라고 생각하는 번역도 맡았고, 캐릭터가 없는 대사에 캐릭터를 부여하기도 했고요. 연출과 그만큼 친밀한 신뢰관계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흔히 작품에 영감을 가져다 주는 이를 뮤즈라고 한다. 뮤즈라고 불리우면 작품에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영예를 안게 되는 동시에, 작품과는 철저히 분리된다. 영감을 주었을뿐 직접 예술 행동을 한것이 아니라는 선이 그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에 관여하며 영감을 불어넣어 왔다. 단순히 뮤즈라고 불리기에 그녀의 예술 행동은 너무나 주체적이다. ‘이런걸 드라마트루기라고 하는건가’ 흐릿했던 드라마터그에 대한 정의가 조금은 선명해졌다. 하지만 드라마터그에 대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이에게 그녀를 타이틀로만 소개하는 건 의미가 없을 터였다. 그녀를 어떤 드라마터그라고 말하면 좋을까. 뭐든 항상 먼저 알고 있는 친구들. 남들보다 먼저 알게 된 것, 먼저하게 된 발상을 이야기해도 잘난척으로 느껴지지 않게 말하는 친구들. 그들이 권한 것은 꼭 해보고 싶게 만드는 힘을 가진, 그런 사람들을 요즘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단어를 찾고 찾았다. 그리고 찾은 것은, ‘핵인싸(핵인사이더의 줄임)’. 농담같이 들리겠지만, 이보다 더 와닿을 표현이 있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2018년 사사반기를 지나고 있는 지금 시기에는 말이다. 그녀는 작품에 있어 다른 구성원들과 다를 것 없는 인사이더다. 


연극 <집에 사는 몬스터>의 경우 외에도 그녀는 작품에 인사이더로 존재해 왔다. 2013년에는 가곡, 거문고, 무용을 필두로 작품을 준비하던 예술가들에게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소개해주었다. 그들은 그녀가 소개해준 소네트 18번을 토대로 공연을 올렸다. 같은 공연을 준비하던 때, 그녀는 거문고 연주가에게 소네트를 음송하는 유튜브 영상을 보여주었고, 거문고주자는 그에 영감을 받아 소네트 음송 소리와 대화하는 듯한 콘셉트의 연주를 세상에 선보였다. 원안이 가진 오음보격 운율과 정서를 살리면서도 가곡과 어울릴 수 있도록 세심하게 가사를 번역한 것도 이단비, 드라마터그다. 작품을 직접 쓴 것도, 연기로 정서를 보여준 것도, 연출을 한 것도 아니지만 그녀는 분명히 작품의 성장과 함께 걸어왔고, 작품 속에 존재한다.



아웃사이더


인사이더로서 작품과 함께 성장한 그녀는, 곧 아웃사이더로서의 드라마터그가 가지는 호기심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고 싶어졌던 것 같다. 연극 <집에 사는 몬스터>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우란문화재단의 해외연수 프로그램 ‘스테이지: 피플’을 신청해 덴마크로 떠났다. “무슨 계기로 신청한건가요?” 라고 묻자 그는 곧 작품 밖에서 연극을 탐구하는 아웃사이더모드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공연이라는 예술에서 (배우의) 몸의 현존이라는 게 어디까지 가능할까 궁금했어요. 덴마크에 있는 오딘 극단에서 그걸 한다고 해서 가 보기로 했죠. 저는 배우는 아니지만 배우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했어요. 그곳에선 저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부끄러워 할  것 없이 경험해 볼 수 있었죠. 오딘 극단이 말하는 대로 배우 훈련을 했을 때 그 ‘무대 위의 현존’이라는 개념에 공감하게 될 수 있을까 궁금했어요. 극단 대표자인 유제니오 바르바도 돌아가시기 전에 꼭 만나보고 싶었고요” 


오딘 극단은 유제니오 바르바라는 연극인이 60년대 초반 연극학교에 입학하려다가 거부당한 이들을 만나 함께 꾸려온 극단이다. 아무도 그들을 연극인으로서 받아주지 않았던 시절, 덴마크의 홀스테브로라는 작은 마을에서 그들에게 헛간을 내주며 연극인으로써 받아들여주었고, 지금껏 그 헛간을 지켜오며 ‘오딘 스타일’의 연극을 선보이고 있다. 


“공연예술 이론서에서 막연하게 텍스트로만 봐왔던 유제니오 바르바를 실제로 보니까 너무 신기했어요.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바르바를 연기하는 바르바가 서있는 것 같다는 인상이 들 정도로. 바르바가 37년생이거든요. 올해로 81세인데, 너무 정정했어요. 열정적인 이태리 청년의 이미지요. 할아버지라는 느낌은 전혀 안 들더라고요.  신체의 움직임, 즉흥에 집중하는 극단이어서인가 싶을 정도로. 오딘극단은 어떤 개념을 일러스트레이팅하기 보다는 몸이 직접 말한다는 것을 강조해요. 배우들이 수십년 간 즉흥을 연습해왔고요. 예를 들어 11월의 어느날 안개가 자욱한 아침을 표현하라고 하면 대부분 그 이미지를 재현하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여기서는 이미지화하는 작업에서 벗어나서 내 몸이 이걸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집중해요. 그냥 움직이는 것과 어떤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고 항상 말해요. ‘무대 위의 현존’ 이 배우에게 중요하다는 말에 결과적으로는 설득 당한 것 같아요. 공연이라는 맥락 안에서 볼 때 배우가 뭘 하더라도 재현의 모습을 띨 수밖에 없잖아요. 어떤 것에 대한 모방이든 재현이든. 또 오로지 그 자체로 현존한다는 게 재미도 없을 것 같고요. 그래서 ‘무대 위의 현존이 가능한가’에 의문이 있었는데 이들이 그 수십년 간 훈련해 온 것들을 보니 궁금증이 풀렸어요. ‘말이나 생각을 한 다음에 그걸 몸으로 표현하는게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하고 그 몸을 통해서 이야기가 전달이 되는 게 가능하구나’라는 걸 깨달았던것 같아요." 


무대 위의 현존의 가능성을 보게 된 그녀가 함께 하는 다음 작품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인터뷰 당시 나눈 대화의 3분의 1은 오딘 극단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녀에 대한 호기심 만큼이나 강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극단이었다. 오딘의 창시자인 바르바가 세상을 떠나면 극단은 해체될 것이다. 그게 바르바의 뜻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오딘 극단의 세월을 착실히 아카이빙 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연극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오딘에 한 번쯤 빠져들어 볼만하다. 공연계의 확실한 ‘인싸’인 그녀가 좋아하는 극단이니까. 이 글을 읽고 이단비가, 또는 오딘이 궁금해졌다면 브라우저에 새창을 열어 검색해보길 바란다. 경계에 선 드라마터그 이단비가 바라보는 세상을 조금은 엿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