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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가 류중현의 Fierceness




그는 자신을 와사비(WASABI)라는 이름으로 소개했다. 어떤 의미냐고 묻지는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왜 그런 이름을 짓게 되었는지 알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와사비’라는 단어에 담긴 고추냉이의 알싸한 이미지는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단박에 느낄 수 있으니까. 인터뷰가 시작되고 첫 오분 간은 정말 그랬다. 간장 종지에 조금만 짜내는 고추냉이 딱 그만큼의 답변, 필요한 만큼의 이야기만을 내놓았다. 원고를 쓰기에 부족하진 않았냐고? 전혀. 적은 양으로도 접시 위 훌륭한 역할을 내는 와사비처럼, 그의 답변도 그랬다. 



Fierce Joy_ 춤에서 찾은 강렬한 기쁨


이번 인터뷰에서의 수많은 질문은 대체로 이 답변 하나로 해결된다. ‘춤을 추다 보니까’. 그만큼 안무가 류중현의 삶은 춤 하나로 많은 것들이 설명된다. 어려서부터 춤을 추던 아이. 유치원에서 다른 친구들이 율동을 배우면, 그는 TV에서 본 마이클 잭슨의 ‘빌리 진’ 안무를 따라했다. 학교에서도 춤을 췄고, 수업이 끝나면 공원에서, 비가 오면 지하도에서 비를 피해 춤을 췄다. 전설적인 댄서들이 모이던 이태원의 성지 ‘문나이트’를 드나들던 마지막 세대가 바로 그였다. 그런 그에게 어떻게 전문 댄서가 되었냐는 물음은 우문이다. 그저 꾸준히 춤을 춰온 것 뿐이었으니까. 별 것 아닌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댄서로 꾸준히 춤을 춘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건강한 신체가 있다는 것, 함께 의지하며 버틸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것, 춤 추는 걸 좋아한다는 것 외에는 기댈 곳이 없다. “중간에 버티지 못한 친구들도 많아요. 의지의 문제라기 보다, 가족이 생기고 가장이 되면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에요.” 그는 요즘 우리나라에서 춤추기 좋은 환경이란 무엇일까 고민하고 있다. ‘후배 세대가 더 좋은 환경에서 춤췄으면 좋겠다’ 같은 듣기 좋은 빈말은 ‘와사비’답게 없다. 당연하고 또 마땅한 답변이다. 그는 춤추기 좋은 환경이 절실한 현직이니까. 



Fierce Pride_ 서로가 다르지 않았다면 ‘자부심’이라는 건 없었을 거야 


그는 많은 장르중에서도 힙합, 스트리트 문화에 더욱 집중하는 댄서다. 하지만 자신의 춤이 비보잉, 힙합에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함께 춤을 추는 친구들이 관심 가지는 장르는 모두 그의 관심사였고 배울 거리였다. 하우스, 팝핀, 락킹, 스탭 위주의 댄스인 비밥, 그리고 힙합댄서라면 왠지 고개를 저을 것 같은 현대무용까지도 그는 관심이 많다. “제 또래 댄서들은 춤이라는 걸 전문적으로 배울 곳이 마땅치 않았어요. 옆에 친구가 추는 거 따라 춰보고, 못보던 스텝이면 따라해보고 안되면 될 때까지 해보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장르를 접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친구들이 심취해 있는 장르가 제각각 이니까요. 그런데 요즘 10-20대 분들은 자신이 추는 한 가지 장르만 고집하고 그 외에는 배척하는 경향이 조금 있는 것 같아요. 좋게 보면 그 장르에서만은 전문적인 고급 기술을 익힐 수 있겠죠. 하지만 춤을 깊이 배운다는 건 다양한 장르간의 차이와, 그 사이의 연결점을 몸으로 감각하는 데에 있는 것 같아요. 심지어 현대무용의 경우는 움직임 자체도 배울 것들이 많지만, 무대 위에 공연을 올리는 과정이나 장르를 공연예술로서 접근 할 수 있는 방법도 배울 수 있으니까요. 지금의 힙합 댄스는 사람을 매개로 전수되는 느낌이잖아요. 거리에서 하던 방식, 버스킹 그 자체가 힙합이었으니까요. 그럼에도 기록됨으로써 하나의 예술분야로 정립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제는 힙합이 거리를 넘어서서 무대로 갓 올려지기 시작하는 단계니까, 다른 장르에서 배울 게 많지 않을까요?”






Fierce Destiny_ 춤으로 만난 인연들 


다양한 장르에 폭 넓은 경험을 가지고 있던 덕분에 그는 우란문화재단의 프로그램을 통해 개발된 연극에 참여해 안무와 움직임을 연출하고 기획하게 되기도 했다. “현대무용을 하는 친구 덕분에 민새롬 연출님을 처음 알게 되었어요. 당시 저희 회사 댄스 퍼포먼스 공연을 진행하는데 공연장 섭외나 조명 연출에 도움을 많이 받았었거든요. 그 공연 끝나고 나중에 민연출님한테 연락이 왔어요. 이번에 하는 연극에 기하학적이고 비일상적인 안무가 필요한데, 스트리트 댄스를 베이스로 작업하고 싶으니 같이 해보자고요. 일부 파트에는 재즈 요소도 필요하다고 했는데, 둘 다 제가 경험 많던 장르들이니까 도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실제로는 돕기보단 제가 정말 많이 배웠어요. 댄서로서 극에 참여한 적은 있지만, 극의 안무를 연출을 해본 건 처음이었거든요. 배경과 캐릭터, 변화하는 드라마를 안무에 녹여내는 연출을 해보는 경험을 해본 거죠. 오직 춤을 위한 안무예술도 좋지만, 안무를 통해서 이미지를 서사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는데, 연극 ‘요정의 왕’ 작업이 많은 도움이 됐어요”

 

Fierce Movement_ 강렬함과 절박함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연극이라는 새로운 경험 이후 그는 우란문화재단을 통해 또 한 번 경험의 폭을 넓히게 되었다. 우란문화재단의 해외연수 지원 프로그램인 시야 스테이지 피플에 선정된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불순한 의도가 있었어요. 제가 오랫동안 활동해온 Just Dance Movement프로덕션 컴퍼니의 공연이 해외 초청 무대에 설 기회가 생기게 된 거예요. 근데 주최측에서 항공권은 지원을 안해서, 사비로 마련해야하는 상황이었어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심정이었는데, 그때 우란문화재단의 해외연수 지원 프로그램 신청 안내 메일을 받았어요. 제 항공권 비용만이라도 아껴보자 싶어서 신청한 건데, 덜컥 선정되니까 너무 찔리더라구요. 그래서 솔직히 말씀드렸죠. 사실은 이런 이유로 신청한 거였으니 제가 가는 것이 맞지 않을 것 같다고요. 근데 국내의 댄스 퍼포먼스 공연을 해외로 확장시키려는 저희 팀의  노력을 읽어주신 건지, 그런 의도였던 걸 알고도 적극 지원해 주셨어요. 더 열심히 준비하게 되더라고요. ‘단순히 항공권 비용만 아낄 게 아니라, 정말 뭔가 배워야겠다!’ 하고요. 그래서 댄서라면 살면서 한 번은 꼭 가봐야 한다는 ‘Summer Dance Forever Festival’ 현장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도록 촘촘히 계획했어요. 후일담이지만 저희 해외공연 항공권 비용은 다행히 주최 측에서 부담하게 되어서, 시야 스테이지 프로그램 비용은 양심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웃음)”





Fierce Battle_ 댄서가 세상과 맞서는 방법 


‘Summer Dance Forever Festival’은 올해로 8년째 열리고 있다. 역사도 짧고, 체계랄 것도 잡히기 어려운 스트리트 댄스 씬에서 8년은 굉장한 숫자다. 그는 이 행사가 이렇게 오래 지속되고 또 발전될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했다. “유럽에서 열리는 국제적인 힙합 행사중에서는 가장 에너지가 많이 모이는 행사예요. 처음에는 배틀만 하던 행사였는데 8년이 지난 지금은 페스티발 형태로까지 커졌으니까요. 신기한 건, 규모가 커졌는데도 초기의 마인드를 유지하고 있다는 거예요. 보통 자본이 커지면 변질되기 마련인데, 이 행사는 스트리트 댄스 문화의 느낌을 계속 유지하고 있죠. 이번에 신기했던 건, 댄스와 관련한 세미나가 열렸던 것 같아요. 실제 아티스트들이 패널로 참여해서 토크쇼 형식으로 진행됐는데, 제가 한국에서 고민하던 토픽들이 던져지더라고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힙합댄스의 예술적 방향성이나 현주소같은 것들이 댄스 페스티발에서 논의된다는 게 놀라웠어요. 이런 논의가 이루어지는 자리가 지속적으로 마련된다는 거잖아요. 그것만으로 굉장한 움직임 같아요. 사실 ‘현대무용’이라고 불리는 춤은 이미 장르화된 역사 깊은 안무예술 분야고, 정말로 현대무용이라고 불려야 할, 지금 우리가 추고 있는 춤은 힙합이나 스트리트 댄스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럼 현대에 이루어지는 논의는 지금 추고 있는 춤에 대한 논의 여야 할 거구요. 그렇게 상상만 했던 것들이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걸 보니 충격적이었어요. 국내에도 이렇게 발전될 만한 행사가 있긴 하지만 아직은 규모가 작아요. 규모가 커지더라도 변질되지 않으려면, 행사가 자리잡기 이전에 많은 것들이 개선되어야 할 것 같아요.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라든가 예술적 활동에 대한 사회적 보장같은 것들이요. 그리고 중요한 건 교육같아요. 우리나라는 주류문화에 대한 교육의 영향이 큰 편이니까요. 학교에서 단순히 학과만 개설해 주는게 아니라, 그에 걸맞는 체계적인 교육을 제공하고, 배운 것을 구현해볼 수 있는 경험 환경을 마련해주는 등 많은 변화들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 같아요”


류중현이라는 사람이 춤이라면 어떤 모습일지 물었다. 우울하고, 비판적이면서, 분노에 가득 찬, 하지만 희망을 꿈꾸는 모습일거라고 그는 답했다. 이보다 더 솔직할 수 있을까. 억지스러운 해석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와사비라는 별명은 안무가 류중현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짧고도 정확한 단어다. 거칠고 맵지만 조화롭다. 재료 간 균형을 맞춰주는가 하면, 스스로도 다른 재료와 절묘하게 어울릴 줄 안다. 류중현도 그렇다. 그는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따갑게 현실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세상을 솔직하게 바라보는 만큼 그가 추는 춤이 전하는 이미지, 그가 던지는 물음은 풍부하다. 삶에 물음표를 이고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라도 그의 춤에 중독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