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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와 한참 떨어진 끝좌석. 어린시절의 이수정은 그 자리에서 눈물을 쏟았다. ‘어떤 기분이 들어서 눈물이 났던걸까요?’라는 질문에 그는 “잘 모르겠어요”라는 말로 답을 시작했다. 사실 머릿속엔 분명한 답이 있었다. 단지 우리 시대에서 사용하고 있는 활어(活語)로는 그 이미지를 한번에 전달할 수 있는 마땅한 단어가 없었을 뿐.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지금 역시 훌륭한 연기를 보거나 아름다운 넘버를 들으면 그때와 비슷한 감정에 휩싸인다고 했다. “나도 그 자리에 서고 싶다는 흥분감과 동경이 뒤섞인 마음인 것 같아요. 그 때도 그런 마음이지 않았을까요?” 그래서였을까.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런던에서 뮤지컬 <라이언킹>을 보고 한국에 돌아온 이수정은 곧바로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 후 그의 인생엔 뮤지컬이 빠지는 법이 없었다. “스스로를 마니아, 덕후라고 생각해본적은 없는데, 지금은 뮤지컬 덕후, 뮤지컬 배우 덕후가 된 것 같아요. 무언가 하나에 깊게 빠지지 않고서는 제대로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솔직히 뮤지컬 질릴 때도 있지 않았냐는 물음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대답은 당연히 “질릴 틈이 없었어요”였다.
Finesse 1. 감정이 표출되면, 이유를 찾고, 이유를 찾으면 그 곳으로 향한다.
뮤지컬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할 때 까지는 몰랐다. 그가 자신의 감정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 사람인지. ‘공연을 보다가 눈물이 났고, 왜 눈물이 났는지 생각해보니, 배우가 되고 싶었던거구나’라고 당연하게 여길 수도 있지만, 사실 ‘공연을 보다가 눈물이 났고, 정말 훌륭한 공연이었다고 생각했다’라고 끝날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끝이 ‘배우 이수정’이 된 이유는 그가 스스로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중심을 흔드는 감정이 찾아올 때마다, 그는 놓치는 법이 없었다. 당돌하고 활발한 성향에 가까운 그가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배역을 연기했을 때가 그랬다. “졸업 직전 <프랭키와 자니>라는 2인극에서 상처가 깊어 사랑에 확신이 없는 내성적인 여자 프랭키를 연기했어요. ‘이 역할을 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이 작품을 떠나보내기 싫다’라고 느낀 첫 작품이었어요. 지금이라도 또 하라면 너무 하고 싶은…” 그는 이 작품에 오랜 시간 마음이 남았고, 왜 마음이 남았을까 이유를 찾았다. “이 작품 전에는 평소 제 성격과 잘 어울리는 당당하고 외향적인 캐릭터를 주로 했었어요. 정 반대의 캐릭터를 처음 하게 된 셈인데, 그래서 였던 것 같아요. 프랭키라는 배역은 너무도 내성적이어서 사람들과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하고, 항상 불안한 감정선을 가지고 있던 캐릭터예요. 그런 연기를 하다 보니 ‘남들에겐 잘 보이지 않지만, 나의 내면에도 내성적이고, 사람들 눈치도 보는 성향이 존재하는구나’라는 걸 느끼게 된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저 스스로에게 각인된 외향적인 성격때문에 드러내지 못하고 있던 감정선을, 연기를 통해 표출하게 되면서 사람마다 내면에 다양한 성향의 겹이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프랭키 이후로는 활기찬 감초 느낌의 조연에서, 내면의 갈등을 더 심도있게 연기할 수 있는 주연급 배역에 캐스팅이 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이 작품이 왜 그렇게 특별하게 느껴졌는지, 그 감정의 이유를 찾아나선 배우 이수정은, 마침내 그 이유를 찾아냈고 연기의 폭을 넓혀갔다.
우란문화재단의 ‘시야 스테이지:피플’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계기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우란문화재단에서 <어쩌면 해피엔딩> 작품으로 연출 워크숍을 진행했을 때, 배우로 참여를 했었어요. 그리고 1년 뒤에 우란문화재단으로부터 해외 연수 프로그램에 지원할 생각이 있냐는 연락을 받은 건데, 정말 하고 싶더라구요. 몇 일 동안 지원서를 안고 살 정도로 너무 절실했어요. 근데 왜 하고 싶은 거지? 묻게 되더라고요.” 왜 하고 싶은지, 그 이유가 마음 속에서 설명되기도 전에 앞서 버린 절실하다는 감정. 그는 곧 절실함의 이유를 찾아 나섰다. “이 해외연수 프로그램을 지원하기 직전에 참여한 작품을 하면서, 같은 레벨에 안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물론 그 작품 내에서도 더 좋은 연기를 하려고 노력하면서 배우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배움이 필요한 것 같았어요. 제가 그 작품에서 하는 대사가 전부 이미지를 많이 싣는 말들 이더라고요. 이를테면 스토리텔러 같은. 그래서 대사를 통해 전달하려는 그 정확한 이미지, 심상을 전달하지 못하면, 대사가 입 밖으로 나와도 대사를 통해 이루려 했던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거죠. 이걸 내가 연기를 하면서 잘 구축 시켰나 돌아보니, 확신이 안 들었어요. 평소에 하는 말이나 행동은, 내가 경험해서 알고, 내 논리를 거쳐 생각한 거라서 그 이미지를 정확하게 아니까 말에 힘이 생기는데, 작품의 배역을 다 경험해볼 순 없는 거잖아요. 그런 부족함을 채우고 싶었던 게 동기가 된 것 같아요. 절실함의 이유가 명확해지고 나니 지원서에도 그런 마음이 잘 전달되어서 참여자로 선택된 것 같고요.”
Finesse 2. 있는 그대로 꾸밈 없이 순수해서 당당한.
그가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면서 가장 많이 고민했던 점은, 자신의 캐릭터와 소리가 따로 논다는 점이었다. 성격은 당차고 활발하고, 외형적으로는 키도 크고, 골격이 있으며, 피부가 비교적 흰 편은 아니다. 이런 이미지의 배우에게는 보통 성악에 가까운 고운 발성 보다는 시원하게 지르는 강렬한 목소리, 즉, 벨터에 가까운 음색을 기대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는 벨터보다는 고운 소리가 섞인 믹스드, 한국에서는 진가성이라고 표현되는 음색을 가진 편이다. 쉬운 예를 들자면 디즈니 만화의 공주 배역의 목소리다. 이런 이유로 오디션에서 몇 번의 실패를 경험한 뒤 그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보이는 이미지에 목소리를 맞추려고 벨터 발성을 흉내내 보려고 노력도 했지만, 타고난 발성이 벨터가 아니면 억지로 바꾸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이 고민이 이번 우란문화재단 해외연수를 통해서 많이 해결됐어요. 꼭 개인 레슨을 받고 싶었던 뉴욕대 교수님이 있었어요. 이번 연수 프로그램 일정을 짜면서 그 분에게도 레슨 요청을 드렸었는데, 흔쾌히 수락해 주셨거든요. 선생님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놨더니, 지금 제가 가장 편하게 내는 이 소리가 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소리라고 하시더라고요. 사실 허스키한 목소리도 조금 있는데 그게 싫어서 일부러 이쁘게 꾸민 목소리를 내면, 금새 알아차리곤 그건 네 소리가 아니니까 평소 말하는 소리, 타고난 소리로 부르라고 했어요. 뮤지컬 <아나스타샤> 조감독을 하고 있는 선생님도 반주자로 와주셨었는데, 오디션 심사자 경험이 많은 분이었어요. 그 분도 목소리를 벨터나 어느 배역에 맞추려고 하지 말고, 가장 잘 어울리는 ‘내 소리’로 불러서, 사람들이 그 목소리의 이미지로 나를 기억하고 어딘가에 배역으로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라고 하더라고요. 당장 그 배역을 따진 못하더라도 말이예요.” 꾸미지 않은 순수한 목소리로 부르면 억지로 벨터를 따라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이 실린다는 걸 그는 배우게 됐다.
순수하다는 이미지는 종종 청순한 느낌으로 표현되곤 한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읽던 책이나 영화, 드라마에서는 흰 얼굴에 가녀린 체구, 하늘 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수줍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어 말하면 청순하고 순수한 캐릭터가 된다. 하지만 정말 순수한 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꾸밈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용기다. 배우 이수정은 순수함이 본래는 당당하고 멋있는 이미지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인터뷰 중 그는 질투가 났던 일이 있으면 질투가 났다 말했고, 욕심이 났으면 욕심이 났다고 말했다. 그 말들은 그의 다른 말들을 더욱 진실성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 사람이 ‘정말 열심히 했다고 말하면, 정말 죽도록 열심히 했던 거 겠구나’ 하고 말이다. 그는 이런 마인드 역시 이번 연수를 통해 새삼 더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남과 비교하지 않아서 행복해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어요. 자기합리화라고 비약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자기 색을 계속 유지하는 건 합리화라기보단 용기 있는 일인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선 여자들이 팔이 조금만 통통하면, 날씨가 너무 더워도 민소매 티 입는걸 꺼리잖아요. 그런 정말 사소한 것부터 주체가 내가 되도록 생각해보면 많은 게 바뀌는 것 같아요. 내가 화장을 오늘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하기 싫으면 안하는 거고. 내가 남들보다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스스로 오늘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면 나에겐 느린 게 아니라 알맞은 속도였던 거겠죠. 예전에는 나보다 더 빨리 발전하는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내가 뒤쳐지는 건 아닌가 불안해 했었는데, 이제는 조금 더 나를 중심에 두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인터뷰를 할 때 자연스레 대화의 시작을 알리고자 형식적인 자기소개를 부탁하곤 한다. 그러면 주로 아래와 같은 형식의 답을 듣곤 한다. OOO에서(소속) OOO을(직업)하고 있는 OOO(이름)입니다. 그런데 그는 인터뷰 질문지의 그 어떤 질문보다도 자기소개에 대한 답변을 마련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고 했다. 나는 나를 배우라고 소개할 수 있는가. 수입이 많고, 큰 무대에 서면 전문 배우라고 할 수 있을까. 네이버에 검색해서 나오면 배우인건가. 길거리 공연에도 스스로 자부심을 갖는다면 배우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자기소개니까 나이를 말해야 하나. 심지어 만 나이가 올해로 몇 이었는지 계산해볼 정도로 그녀는 ‘스스로를 소개하는 방법’에 대해 한동안 고민했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는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가장 ‘이수정’답게 노래하고 연기하는 모습이 무엇인지, 또 나는 누구인지. 다만 그런 자신을 한 마디로 표현해줄 말을 골라내지 못했을 뿐. 시간이 오래 지나 민간인의 우주여행이 가능해지는 미래가 오더라도, 배우 이수정이 가진 그 특별한 이미지를 한 번에 설명해 줄 수 있는 단어가 만들어질 확률은 0에 가깝다. 하지만 그렇게 먼 미래에 도달하기도 훨씬 전에, 이미 그 단어는 찾을 필요성을 잃을 것 같다.
‘안녕하세요. 뮤지컬 배우 이수정 입니다.’라는 짧지만 꾸밈없는 인사 하나만으로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단박에 설명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