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피플

우란피플

사업보고 게시글

긍정하는 네오필리아, 정수봉 개발자






지난 6월, 새로운 앱 하나가 구글 플레이스토어와 애플 앱 스토어에 공개됐다. 사전 체험판이라고 소개된 애플리케이션의 이름은 ‘T for 2’. 우란문화재단에서 펼친 프로젝트 <T for 2>가 온라인 환경에 맞게 개발되어 선을 보인 것이다. ‘플링커’에서 제작한 이 앱은 새로운 방식의 차 마시기 경험을 제공한다. 앱의 완성본을 선보이기 전, 플링커의 정수봉 개발자를 만나 진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모두를 위한 티타임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하자 가장 먼저 ‘초대합니다’와 ‘초대받았습니다’라는 선택 창이 등장했다. 안내에 따라 친구와 연결되는 순간 스마트폰의 화면이 바뀌었다. 카메라가 비추는 전방의 광경 위에 민덕영 작가의 차탁과 각종 도구가 실감 나게 차려졌다. 찻잎을 집어가며 맛을 선택하고, 우려낸 차를 잔에 따르고는 입김을 호호 불었다. 조르르 찻물 흐르는 소리와 찻잔 부딪히는 소리가 기분 좋게 흘러나왔다. 온라인에서 연결된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고 찻잔을 나누던 언젠가처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T for 2’는 우란문화재단과 강은경 식경험 디자이너가 기획한 동명의 프로젝트 <T for 2>의 일환으로 제작됐다. 비대면이 화두로 떠오른 시대 상황과 메타버스라는 차세대 기술과도 맞닿은 프로그램이었다. 플링커의 정수봉 개발자에게 앱 개발을 처음 제안 받았을 때의 심정을 묻자 짧지만 명료한 답이 돌아왔다.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죠. 우리 팀과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도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저희에게 재미와 호기심만큼 강한 동기 부여는 없었어요. 온라인에서 차를 마신다는 설정에 처음부터 강하게 이끌렸어요.”





앱을 개발하면서 가장 중점적으로 고려한 사항은 사용자의 입장이었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했고, 간단히 조작할 수 있어야 했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 적용되었다고 해도 사용자가 경험하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일 테니까. 이를 실현하기 위해 다듬어야 할 사항은 당연히 한둘이 아니었다. 증강현실을 구현하면서 동기화에 대한 문제가 특히 자주 발생했다. 발열이나 영상 녹화, iOS와 안드로이드 간의 상이한 시스템 구조, 물과 재료를 표현하는 효과 등도 보완을 거듭해야 했다. 

기획 의도를 반영하고,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 많은 부분이 수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플링커의 팀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솔루션을 찾았다. “우란문화재단의 전폭적인 지원과 문제를 극복하려는 팀원들의 책임감이 없었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일이에요. 모두 스스로 뿌듯하고 보람을 느낄 만한 결과물을 원했거든요. 역설적이게도 어려워서 즐거웠어요.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희열이 뒤따르더라고요.”



놀이를 위한, 놀이에 의한


정수봉 개발자에게 ‘T for 2’는 애플리케이션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전까진 프로젝트 진행 도중에 인원이 충원되곤 했으나, ‘T for 2’는 5명으로 완성된 팀이 처음부터 함께한 첫 번째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플링커의 역사는 그가 다니던 회사에서 퇴직하고 청주에서 법인을 세운 2018년에 시작됐다. 사명을 지은 것도 그즈음. 프로그램 제작의 마지막 단계인 ‘build’를 상하로 뒤집어 ‘plinq’로 만들었다. 정직하게 단어를 나열해가며 ‘개발’이라는 주요 업무를 애써 내보이고 싶진 않았다. 디자인이 가미된 로고까지 만들어지자 기술을 토대로 미적 요소 역시 아우르겠다는 회사의 모토를 은근히 암시하는 듯했다. 이후 단어 말미에 ‘er’을 덧붙여 지금의 사명, ‘plinqer’가 완성됐다. 



한동안 혼자 일하던 그는 디자이너와 큐레이터를 영입했다. 이후 메인 개발팀 소속이 될 사운드 디자이너와 비디오 아티스트를 맞아들였다. 음악을 전공한 사운드 디자이너는 알고리즘에 능하고, 비디오 아티스트는 개발에서 비주얼 표현을 담당한다 . 이들과 함께하게 된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모두 예술과 기술을 융합하는 작업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정수봉 개발자가 팀원들과 반드시 공유하고 싶은 가치관이자 아티스틱한 작업을 하는 데 가장 필요한 정체성이었다. “그래서 회사보단 팀으로 알려지고 싶어요. 딱딱한 규칙에 따라 돌아가는 집단보다는 자율적인 분위기 아래 운영되는 그런 팀이요. 위계와 질서보다 자율이 보장될 때 더 즐기면서 일할 수 있다고 믿죠. 과제보단 놀이 같은 개념으로 업무에 접근하고 싶어요.”





‘놀이’라는 단어엔 플링커가 예술과 기술을 바라보는 관점이 축약되어 있기도 하다. 플링커가 프로젝트를 완성해 나가는 과정, 그리고 결과물의 속성 역시 놀이의 특성과 겹쳐진다. 

정수봉 개발자가 놀이라는 개념을 주목한 시점은 2019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수행한 프로젝트<Every day is Playful Media>에 참여했을 때다. 물론 그의 이전 작업에서도 놀이라는 콘셉트를 읽을 순 있지만, 한예종에서의 프로젝트는 추후 작업 방향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그가 맡은 파트는 ‘It’s Playful Day’. 미디어 세계의 주요 요소인 아이디, 빛, 움직임, 소리, 시간을 어린이가 게임을 통해 이해하도록 기획된 교육 공간이자 전시였다. 정수봉 개발자가 목격한 놀이의 가능성은 무한했다. 어떤 주제라도 놀이의 형식을 통해 콘텐츠화 할 수 있었으며, 관객은 수동적인 존재에 그치지 않고 직접적인 행위자가 됐다. 참여자의 주체성이 강조되는 만큼 이들을 세계관 안으로 초대하는 매개, 즉 기술의 중요성이 강조됐다. 예술과 기술의 결합을 그려오던 한 테크니션의 미래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플링커가 앞으로 완성해야 할 프로젝트의 핵심 키워드도 ‘놀이’다.  몇 달 전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주관한 ‘비대면 스타트업 육성 사업’에서 플링커가 출원해 선정된 주제는 ‘플레이 뮤지엄’. 증강 현실 기술이 적용된 게임이자 교육 콘텐츠로,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전시품을 수집한다는 내용이다. “아이들이 미술관에서 좋은 작품을 무심코 지나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게임을 활용하면 어떻겠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실보다 게임에서의 체험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올 때가 있잖아요. 직접 모은 예술품을 자신만의 갤러리에 보관하고, 전시회를 열어 친구들을 초대할 수 있어요. 증강 현실로 접한 작품은 평생 기억으로 남을 거예요. 그리고 이는 예술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될 수 있겠죠.”



창작하는 테크니션


그의 말처럼 어린 시절의 특별한 경험은 관련된 분야에 대한 흥미를 일으키고 재능을 쌓아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역시 컴퓨터라는 강렬한 기기를 접한 후 IT와 얽히고설킨 성장 과정을 밟아왔다. “기계를 좋아하셨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어요. 아버지가 사용하던 286 컴퓨터를 이리저리 조작하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죠. 항상 또래보다 빠르게 IT 기술을 습득했어요. 주로 OHP 필름으로 발표 수업을 하던 중학교 시절엔 파워포인트로 발표를 준비하고, 남보다 먼저 홈페이지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IT에 대한 관심 역시 새로운 것에 대한 궁금증의 일부 같아요. 타고난 성향이라고 해야 할까요? 군인이셔서 수없이 이사와 전학을 다녔는데, 스트레스는커녕 새로운 환경이 매번 기대될 정도였거든요.”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대학 시절도 새로운 과정의 연속이었다. 컴퓨터 그래픽스라는 분야를 비롯한 전문 소프트웨어는 그가 그려낼 수 있는 가상 세계를 획기적으로 넓혀 놓았다. “기술이 확보되자 점점 ‘표현’에 욕심이 나기 시작했어요. 저만 할 수 있는 참신한 표현이 무엇일지 고민도 하고요. 그러던 중 우연히 접한 ‘디지로그 사물놀이’가 큰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무대에 홀로그램을 투사해 훨씬 역동적이고 풍성한 사물놀이 판이 벌어졌죠. 기술이 예술과 접목되면 또 다른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정수봉 개발자는 현재 미디어 아티스트로도 활약하고 있다. 학업을 마치고 입사한 회사에서 작가들과 함께 작업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테크니션과 아티스트의 영역을 넘나들게 되었다. 

어쩌면 대학 시절부터 들었던 표현에 대한 고민이 작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추상적인 생각이었지만, 제가 느끼는 바를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었어요. 이후 작가들과 현장에서 부대껴가며 일하면서 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가 점차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죠. 

미국의 밴드 ‘OK Go’ 역시 작업에 큰 자극이 됐어요. ‘Here It Goes Again’이라는 노래 뮤직비디오의 ‘Treadmill dance’가 유명한데, 런닝머신 위에서 퍼포먼스를 벌이죠. 딱히 첨단 기술을 쓰지도 않고 자신들이 표현하고 싶은 음악을 바탕삼아 그때마다 적절한 기술을 활용해요. 이후 나오는 작업들도 늘 재미있고요. 무엇을 표현하느냐도 중요하지만, 때론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라는 걸 느껴요.” 


뮤직비디오에 이어 영화로 주제가 옮겨가자 정수봉 개발자는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터널 선샤인>에서 미셸 공드리 감독이 그려낸 영화적 표현을 보며 감탄했어요. 초현실적인 세계에 대한 연출이 재미있고,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의미가 볼 때마다 새롭게 눈에 띄곤 하죠. 개인적인 사연 때문에 좋아하는 영화기도 해요. 지금의 아내와 20대 초반에 처음 만났어요. 이 사람과 결혼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 정도로 잘 통했죠. 하지만 여러 상황으로 인해 몇 년간 멀어지게 됐고,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 간절한 마음을 품고 보던 영화가 바로 <이터널 선샤인>이에요. 결국 우연한 계기로 인연이 닿으면서 만난 지 7년 만에 결혼했죠. 그래서 이 영화가 더 특별한지도 모르겠어요.”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자 개발자, 작가, 그리고 아빠이자 남편으로서의 자세를 함축하는 한 마디가 궁금해졌다. 답은 짧지만 분명했다. “‘긍정’이요. 하하. 잘되는 것도 의미가 있고, 안 되는 것도 분명 제 삶에 의미가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올해로 일을 시작한 지 정확히 10년이 됐어요. 삶을 긍정하고, 미래를 낙관해서일까요? 지금까지 ‘잘 될 거야’라는 다짐이 무의미한 적은 한 번도 없었네요.”

글: 이재현

사진: 황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