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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oran People> 이상향을 향한 여정, 이상준 공간 디자이너





영리하게 짜인 무대와 고아하게 구성된 전시 공간. 예술적 창작물을 펼쳐 보일 장소는 작품에 쏟아질 관심의 크기를 좌우하기도 한다. 지난 12월 16일에 막을 내린 <해가 서쪽으로 진 뒤에>는 여러 작가의 작품을 조명하는 동시에 공간으로서의 예술까지 명시한 전시였다. 우란문화재단1층에 위치한 ‘우란 1경’을 양반 문화가 관통하는 현장으로 재창조한 공간 디자이너 이상준. 스튜디오를 설립해 작가로서의 행보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그를 만났다. 



미술관으로 소환한 전통

<해가 서쪽으로 진 뒤에> 프로젝트는 그동안 그가 맡아온 업무와는 결이 조금 달랐다. 인테리어 회사에서 약 5년간 근무하며 주로 사람을 위한 공간을 그려왔기 때문이다. 공간 미술이라는 개념을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습득하기 위해 인테리어를 시작했지만, 주거용 공간의 설계라는 업무 목표는 종종 한계로 다가왔다. 사용자 편의에 맞춘 구성, 의뢰자의 기호에 부합하는 디자인 역시 창의적인 접근을 저해하는 조건으로 작용했다. “조각을 전공한 학부와 실내 디자인을 공부한 대학원 과정에서부터 갈증이 이어진 듯해요. 언젠가 제 색깔을 내고 싶다는 욕심이라고 해야 할까요? 우란문화재단으로부터 제안을 받았을 때 그래서 막연히 즐거웠어요.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죠. 작품을 위한 공간 설계도 흥분되는 일이지만,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눠가며 호흡을 맞추는 과정이 그리웠나 봐요.”



<해가 서쪽으로 진 뒤에>는 공예작품과 현대미술작품을 통해 조선의 사회문화적 가치와 미감을 들여다본다는 취지로 기획됐다. 각기 다른 형태의 창작물이었지만, 전통의 산물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기획 단계에서 ‘한국적인 공간’으로 가닥이 잡히자 서원이 떠올랐어요. 조선 시대 양반 문화의 전당인 동시에 지금도 허물어지지 않고 전국 각지에 남아있죠.” 깊이감이 있는 데다 층계가 있는 전시 공간의 특성 역시 서원과 이질감 없이 포개어졌다. 입구부터 오르막이 이어지는 구조는 서원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였다. 



대학원 시절부터 그가 주목한 예술 이론인 ‘흐름의 동시성’과 ‘하이퍼 매개’는 전시공간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대전제가 됐다. “시간은 분절되지 않는다는 사유로부터 흐름의 동시성이라는 개념이 시작됩니다. 끊기지 않는 시간 덕분에 기억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층위를 이뤄가면서 대물림될 수 있죠. 우리 모두 시간에 속한 존재예요.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죠. 반면 하이퍼 매개는 시각적인 표상 양식이라고 볼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전시 공간에 설치한 기둥과 보는 서원이라는 형식을 표현하는 매개로 사용됐죠. 이를 통해 관람객은 기억을 더듬어 전시를 해석할 수 있어요. 각자의 시간 어딘가에서 유영하는 잠재된 기억이 이번 전시와 같은 어떤 경험으로 인해 더욱 선명히 떠오르고, 다시 새로운 기억과 경험이 한 층 더 쌓이는 순간을 마주합니다. 두 개념으로 기대할 수 있는 궁극적인 효과를 묻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무의식 속에서 감탄을 끌어내고 싶었어요. 어떤 이해나 논리에 앞서 더 직관적이고 감성적으로 표현의 대상을 마주할 수 있었으면 해요. 멋진 풍경을 보고 단숨에 ‘아!’라며 탄복하는 것처럼요.” 







이상과 표징으로서의 세계 

작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에 대해 질문하자 그는 단숨에 올라퍼 엘리아슨을 꼽았다. 덴마크 태생의 미술가인 그는 작품 활동과 더불어 기후 위기를 설파하는 사회 운동가로도 활발하게 활약하고 있다. “올라퍼 엘리아슨은 자연에서 소재를 찾아 자신의 예술관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능력이 있어요. 누구보다 자연을 잘 이해하는 혜안을 지녔죠. 자연은 이미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작품 역시 강력한 에너지를 내재해요.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 들여놨던 거대한 태양 조형물을 필두로 그가 내보이는 작품의 스케일은 대부분 어마어마해요. 시각적 규모에 압도되어 넋을 잃고 볼 수밖에 없어요.” 올라퍼 엘리아슨에게서 훔치고 싶은 능력을 묻자 ‘차라리 그의 작품이 모두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올라퍼 엘리아슨의 영향은 새로 설립한 스튜디오의 이름 비아문(VIAMOON)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널리 이미지화된 뭔가를 이름으로 내걸고 싶었어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꽃으로 간판을 대신하는 설정처럼요.” 고민하던 그의 머릿속에 불현듯 달이 떠올랐다. 올라퍼 엘리아슨이 달을 소재로 창작한 작품 역시 스쳐 지나갔다. “달은 ‘태초의 감수성’을 간직한 천체예요. 누구나 알고 있는 대상이지만, 누구도 함부로 마주할 수 없는 게 달이었어요. 문명을 막론하고 이야깃거리의 화수분인 동시에 우주 정복의 욕망이 집결된 곳이기도 했죠. 무구한 세월 동안 밤하늘에 뜨고 내리길 반복했고요. 이보다 명료하게 흐름의 동시성을 드러내는 존재가 있을까요?”








선한 영향력의 가치 

그는 명함에서 자신을 ‘디렉터 이상준’으로 소개하고 있다. 여러 호칭을 떠올렸지만, 현시점에선 디렉터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리라고 판단했다. “사실 대표님 같은 호칭보단 작가 혹은 디자이너라는 호칭을 더 듣고 싶어요. 작품 활동을 더 활발히 해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람보단 창작자로서의 면모가 더 드러났으면 하는 마음이죠.” 자신의 이름을 내걸기 시작한 이후로는 작품뿐만 아니라 작가로서의 태도와 책임에 관해서도 궁리하고 있다. 이는 이상준 작가가 지금도 미술을 하는 이유에 대해 자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창작이란 결국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한 활동이라고 생각해요. 작가가 된다는 건 크든 작든 영향력을 수반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죠. 어떤 의견으로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해 나갈지, 무슨 경험을 공유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10년 후엔 대중에게 화두를 던지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선한 움직임을 이끌어 내야겠죠. ‘한국의 올라퍼 엘리아슨’이라는 별명까지 얻으면 더 좋겠고요.”



2020년은 이상준 작가가 익숙하지만 새로운 세계로 발을 뻗은 첫해였다.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해가 서쪽으로 진 뒤에>의 전시 공간을 꾸며낸 데 이어 서울역 광장의 ‘레코드 284 AR 체험존’의 디자인에 참여하기도 했다. 정신없이 1년을 보낸 그에게 이번엔 새로 다가올 한 해의 목표를 묻자 현실적인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아직 혼자 일하고 있어요. 그런데 모든 일을 도맡아 하기가 점점 힘들어지더라고요. 마음 맞는 팀원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애정이 가는 작업실도 마련하려고요.” 소소한 계획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결국 작품 활동에 관한 구상으로 매듭지어졌다. “2021년엔 그동안 생각만 해온 전시를 꼭 열 생각입니다. 계절을 주제로 한 작업을 하고 싶어요. 여름에 관한 이야기를요.”




글_이재현

사진_황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