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피플

우란피플

사업보고 게시글

빛의 항해자, 김형연 조명∙무대 디자이너






무대에는 빛과 어둠의 간극이 존재한다. 그 공간에서 연기하는 배우를 통해 관객들은 감정의 진폭을 경험한다. 어쩌면 그 경험 사이엔 조명이라는 감각이 크게 자리할지 모른다. 일부러 인식하지 않더라도 감정을 느끼고 인지하는 과정 사이사이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빛의 힘. 이런 섬세한 과정을 직조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명 디자인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로부터 한 발자국 더 가깝게 다가가도록 만드는 분야다. 김형연 조명 디자이너는 인생의 꽤 오랜 시간을 빛과 함께 관객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그의 대학시절 전공은 심리학이었다.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무대 미술 그 가운데서도 조명이란 세계에 자연스럽게 입문하게 됐다. 2001년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를 시작으로 느슨하게, 때로는 촘촘하게 다채로운 연극 작품에 참여해왔다. 그가 생각하는 조명이란 뭐라고 정의 내리긴 어렵지만 “감각적인 무언가”에 가깝다. 조명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작품을 분석하고 정리하는 일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한다. 



사유하는 빛, 변화의 시작 


그가 참여한 작품 가운데 2018년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열린 <믿음의 기원2> 는 특히 기억에 남는 연극이다. “이 작품을 하면서 관객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됐던 것 같아요. 객석과 무대가 같이 있는 가운데서, 배우가 연기를 펼치는 독특한 방식의 작품이었어요. 관객의 시점이 달라지면서 그만큼 다양한 관점이 생겨날 수 있는 구조인 거죠. 무대 위에서 배우와 배우가 어떤 관계를 맺을 때 조명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지에 대해 고민하게 됐던 계기가 되었어요.” 

2020년 서강대 메리홀 소극장에서 열린 <스푸트니크>도 조명 디자이너에겐 새로운 자극을 느끼게 해주었던 작품이다. 당시 이 작품에서는 관객과 배우 모두 한쪽에서 떨어지는 똑같은 빛을 받는 순간이 존재한다. “조명이 굉장히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경우였죠. 그 과정이 인터미션처럼 보이기도 하고 혹은 갑자기 그 공간이 확 달라지는 것으로부터 오는 감흥을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느낄 수도 있었어요.” 






협업의 힘을 경험한 <WALK ON>


어떻게 보면 김형연 디자이너가 지난 2019년 참여한 <WALK ON> 또한 변화의 연장선 상에 놓인 작품일지 모른다. 우란이상 레지던스연구 프로그램으로 당시 김형연, 목소, 배선희, 이윤정 네 명이 모여서 만든 이 작품은 개인이 느끼는 불안을 각자의 방식으로 연구한 결과물이다. 관객이 직접 참여자가 되어 주어진 지시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완성되는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우란3경에 모인 5명의 관객은 약 40여 분간 시간을 함께 보내며 집중과 관찰을 통해 여러 감각을 탐구했다. “서로 다른 개인의 사유와 감각의 경험이 만나게 되는 지점에 관심을 갖고 접근했어요. 우리가 직접 경험한 것이 어떤 기억이 될 수 있을까? 모르는 사람과 만나서 낯선 경험과 감각에 대해 연구하고 실험하는 과정이었죠. 20년 가까이 작업을 해오면서 손에 꼽을 만큼 좋은 협업이었다고 생각해요. 관객을 훨씬 가까이서 만나보게 된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조명, 음향, 배우, 안무 서로 다른 길을 걷다 한 장소에서 만난 네 사람은 좋은 시너지를 냈다. 이들의 인연은 다른 작품으로 계속해서 이어졌다. “목소 감독님과는 <스푸트니크>에서 다시 만났고, 이윤정 안무가와는 <설근체조>라는 공연에서 호흡을 맞췄어요. 배선희 배우가 연출한 작품에서 함께 작업하기도 했었고요. 서로 바쁘게 활동하고 있지만 이렇게 각자의 작품에서 가끔 다시 만나기도 했어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기회가 되면 언제든 <WALK ON>과 이어지는 후속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김형연 디자이너는 가장 최근 우란3경에서 또 한 번 작업했다. 서울익스프레스가 참여한 우란이상 레지던스연구 프로젝트 발표 <Code for Love>에서 공간 디자인으로 참여한 것. 이번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이들의 결과물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경험 디자인에 대한 부분에 신경을 쓰려고 했어요. 최대한 작품이 깔끔하고 돋보이도록 잘 표현된 것 같아요. 너무 요란하지 않게, 무대나 조명이 너무 과해서 핵심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벌써 우란 3경에서 세 번째 작업을 하게 된 그는 이 공간에 대해 “자기 색깔이 확실하다”라고 말했다. “창문이 많아서 거실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지하철이 지나가는 것도 보이고, 이것저것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해볼 수 있는 공간이죠.”






논리와 분석은 나의 힘 


그에게 어디서 영감을 얻는지 물었다. 김형연 디자이너는 여기저기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그때그때 좋은 사유의 힘을 얻곤 한다. 마크 로스코, 올라퍼 엘리아슨, 제임스 터렐 등 유명한 작가의 작품에서 무언가를 떠올릴 때도 있고, 책, 영화 모든 것이 그에게 좋은 영향을 준다. 그리고 누군가는 조명, 빛의 힘으로부터 강렬한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연극을 보면 사람들이 어떤 순간을 기억하게 되잖아요. 그 순간을 기억하게 만드는 과정 속에서 조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무언가를 기억하는 순간과 빛은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관객들이 조명을 통해 그런 감각에 대한 기억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베테랑에게도 가끔은 작업이 풀리지 않는 순간이 찾아올지 모른다. 무언가 장벽에 가로막힌 기분이 드는 순간 어떻게 해결해 나갈까? “계속 고민이 될 때 배우들이 리허설하는 모습을 카메라로 찍어서 그걸 계속해서 돌려봐요. 저는 논리가 생기지 않으면 작업을 잘 진행하지 못해요. 조명에 대한 제 나름의 콘셉트, 논리, 분석이 명확하게 서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요. 그래서 어떻게든 제 안의 논리를 찾아내려고 하죠.” 

마지막으로 그에게 좋아하는 일, 어렴풋이 그려보는 미래에 대해 물었다. “저는 각자의 취향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한 작품 안에서 가능한 많은 것을 찾아낼 수 있는 공연이 좋은 공연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어떤 연극을 보고 나서 자신의 일상이 조금씩 달라짐을 느끼는 것처럼, 빛 안에 잠시 머무르면서 누군가에게 그런 다른 일상을 선사할 수 있는 공간과 조명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ㅡ

글: 김아름

사진: 황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