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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발견자, 이준우 연출가





의심과 발견, 이준우 연출가와 한 시간 남짓 대화를 나눈 후 뇌리에 남은 단어다.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연극의 세계로 입문한 그는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야기에 매력을 느낀다. 그리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한다. 이 두 가지는 계속해서 실험하고 창작하고 싶은 힘이 되어준다. 이준우 연출가가 작년 가을부터 일 년 가까이 붙잡고 집요하게 탐험했던 새롭고 낯선 세계 <붉은 낙엽>을 만난 건 필연 일지도 모른다. 



의심은 나의 힘 


연극 <붉은 낙엽>은 토머스 H.쿡의 추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이준우 연출가가 시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무언가에 대해 리서치하고 연구하는 걸 좋아해요. 우리가 잊고 살거나, 기억해야 할 어떤 것을 발굴하고 그것을 극으로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죠.” 김유철 피디와의 대화를 통해 두 사람은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드라마”라는 키워드에 마음이 통했다. “그동안 역사극이나 창작극을 중심으로 해왔는데 이번에는 재미있는 드라마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험적이고 다큐멘터리적 성격이 있는 무언가를 함께 떠올렸죠.” 평소 추리 소설을 좋아했던 그는 <붉은 낙엽>에 대해 “추리극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결국 이것은 의심에 대한 이야기이고 가족에 대한 이야기에요. 믿음이란 것, 그리고 우리가 쌓아두고 있는 관계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묻고 있는 작품이죠.”라고 소개했다. 


<붉은 낙엽>은 평화로운 가을, 어느 날 한 소녀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주인공이 아들을 비롯해 과거의 가족들을 의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의심이란 화두가 유난히 그의 마음에 깊게 와닿았다. “남자 주인공인 에릭이란 인물이 저와 매우 닮았어요. 저 역시도 항상 의심이 많은 편이거든요. 그래서 '의심'이라는 키워드가 흥미로웠고, 그것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체중이 4키로 가까이 빠졌다고 했다. 그의 손에는 보약처럼 홀짝이는 쌍화차가 손에 쥐어져 있었다. 우란이상 공연예술개발 프로그램은 대본을 창작하고 내부 리딩으로 가능성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트라이아웃 공연의 형태로 무대에 올려지기까지 수많은 수정과 보완의 시간이 필요한 것. “대본이 나오면 끝인 줄 알았으나,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었어요.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었죠. 대본을 수정하는 과정에 많은 공을 들였어요. 사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내부 리딩을 통해 작품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이야기를 한 번 더 탄탄하게 다질 수 있었어요. 


이준우 연출가는 오랜 기간 김도영 작가와 호흡을 맞춰왔다. 이번 작품에도 두 사람은 같은 배를 탔다. 200시간 가까이 통화를 나누며 탑을 쌓아 올렸다. “좋은 작가와 함께 지속적으로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자 복이라고 생각해요. 김도영 작가와 오랫동안 함께 작업을 해오다 보니 서로를 잘 알고 있고, 정말 별의별 이야기를 편하게 나누는 사이죠. 그렇기 때문에 작업의 물꼬를 트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아요. 이번에도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 어렵지 않게 결정했어요. 다만 소설을 각색하는 작업은 저희 모두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떤 방향으로 구성할지에 대해 많은 시간을 들여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소설의 희곡화, 희곡의 대본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두 사람은 소설이 가진 고유의 특징을 잘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원작과는 조금 변화를 준 부분도 있다. 각색 과정은 새로운 도전이기도 했다. “소설에 담겨있는 수많은 묘사들과 설명, 그리고 장면의 진행, 인물에 대한 것들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무대에서 보여줄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어요. 소설이 담고 있는 것을 무대에서 어떤 양식으로 어떤 점에 주안 점을 두고 보여줄 것인가를 상상해 보며 무대와 조명을 계획하는 과정이 흥미로웠죠.” 







연극과 영상의 접점을 찾아서 


코로나라는 대재앙으로 인해 공연의 연습 과정은 쉽지 않았다. 배우들은 마스크를 끼고 연습해야 했고, 트라이아웃 공연은 일반 관객 관람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코로나 상황이 다시금 심각해지면서 대부분의 공연이 비대면으로 진행되거나 취소 혹은 연기되고 있어요. 같은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공연을 중지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공연은 관객과 만나야 하니까요. 최근에는 스트리밍을 통해 공연을 보여주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데 저 역시도 공연의 영상화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어요.” 이준우 연출가는 이번 작품을 하면서 공연 실황 중계 형식의 작업을 떠올렸다. “연극과 영화가 결합된 새로운 장르를 시도해 보고 싶었어요. 무대 곳곳에 카메라 6 ~7대를 설치해 두고서, 관객들이 모니터로 무대의 보이지 않는 장면을 보도록 하는 거죠. 예전부터 영화나 다큐멘터리 감독님과 협업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막연하게 친구인 김대환 감독과 언젠가 같이 작업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생각해요. 영화 <철원기행>으로 데뷔해서 <기생충> 작업에 참여했고, 지금은 강원도에서 ‘봄내필름’이라는 영화사를 운영하고 있어요.” 


이준우 연출가는 영화에도 관심이 많다고 했다. 요즘 그에게 영감을 주는 감독은 타르코프스키와 지아장커, 그리고 올해 가장 인상 깊게 본 작품은 <지구 최후의 밤>. 그야말로 낯설고 기묘한 체험을 하게 하는 영화라고. 미술을 전공했던 그는 원래 배우가 되고 싶었다. 비록 자신이 연기한 모습을 영상으로 보고 크나큰 충격을 받았지만, 여전히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동경이 있다. <붉은 낙엽>의 공연 영상도 원작자인 토머스 H.쿡에게 보내주겠다고 했다. 꼭 한번 만나 작업해보고 싶은 사람으로는 류이치 사카모토를 뽑았다. 언젠가 무대에 올려보고 싶은 작품은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삶과 죽음의 의미를 찾아가는 이야기에요. 신과 구원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어요.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지만, 언젠가 꼭 한 번 연극으로 만들어보고 싶어요. 그는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어떤 스토리나 서사에 매력을 느끼는지 물었다. “현실을 잘 묘사하고 있는 이야기에 끌리곤 해요. 사건이나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심리적인 진실 혹은 감각 같은 것을 전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일상 속 아름다움이 깨지는 순간에 관심이 많아요. 살면서 가장 크게 와닿거나 무언가 진짜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은 대부분 일상에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스며드는 이야기 


그가 2017년 만든 극단 배다는 어떤 향기가 몸에 배듯 오래도록 관객의 마음에 남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출발한 예술 집단이다. 현시대를 비추며 삶에 스며드는, 울림 있는 연극을 지향한다. 10월 28일부터 11월 8일까지 남산예술센터에서 <왕서개 이야기>라는 연극을 올린다. 이 작품은 2018년에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에서 발표한 <무순 6년>에서 일본전쟁범죄자들이 자신들의 과거 행위를 재현하는 극중극으로 만들었던 대본을 기반으로 시작했다. “처음으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던 작품입니다. 일본의 침략 전쟁 당시, 일본군은 어떤 정신을 갖고 살아왔던 것일까, 대체 왜 그런 끔찍한 만행들을 저질렀을까, 인간의 잔혹함과 악함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왜 그런 끔찍한 짓을 하고도 반성하지 않았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내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나는, 우리는, 과연 그들과 정말로 다른 정신을 갖고 살고 있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그것과 얼마나 다를까. 이러한 질문들이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이준우 연출가는 공연을 준비하면서 중국의 무순전범관리소와 그 인근 지역 답사를 다녀왔다. 여전히 전쟁범죄에 대한 글을 계속해서 찾아보고 모으고 있다. 

그가 지금 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 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비롯할까? “연극을 하기 전까지는 나 자신 밖에 모르고 살았어요. 세상의 중심이 저였죠. 연극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것 같아요. 연극이 저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줬어요. 지금도 여전히 이 일을 할 수 있는 이유인 것 같아요. 인간이 갖고 있는 폭력성과 고통, 그런 지점을 계속해서 찾다 보면 뭔가를 발견할 수 있겠죠.” 

글: 김아름

사진: 황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