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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보통의 예술가, 정흥섭




정흥섭, 현대미술가이자 공간을 디자인하는 사람. 그의 인생에는 촘촘한 변화가 있어왔다.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줄곧 좋아했던 미술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프랑스로 훌쩍 건너가 순수 예술을 공부한다. “인상파, 사실주의, 표현주의 그림을 좋아했는데 근원을 찾다 보면 결국 프랑스에서 모두 시작되었더라고요.” 그렇게 막연한 호기심을 안고서 그는 세계를 무대로 많은 걸 보고 듣고 경험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2 ~ 3년 정도 작가 생활을 했지만 그가 생각하는 이상과 현실엔 차이가 있었다. 그렇게 두 번째 변화가 찾아온다. “작가로 활동하는 것이 저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시를 하면 할수록 제가 생각하는 예술 활동과는 좀 거리가 멀었던 것 같아서 자괴감을 느꼈죠. 최대한 다양한 예술 영역의 활동을 포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어떤 형태든지 예술이라고 이름 붙인 것을 다 끌어안을 수 있는 공간.” 1년이란 시간을 공들여 서교동 ‘비둘기암살단’이라는 복합문화공간이 탄생했다. 일종의 창작 준비 공간이자 온갖 실험적이고 진보적인 예술의 씨앗이 움텄던 공간. 정흥섭 작가는 이곳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인연을 만들었다. 

사각지대 안에 숨어있는 예술의 본질

정흥섭 작가의 예술관은 심플하고 또렷하다. “예술이라고 이름 지어진 것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이미 예술로 규정되고 장르화되고 나면 예술의 본질은 사라진다고 생각해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사각지대, 보이지 않는 공간, 그 공간 속에 있는 예술적 본령과 본질에 관심이 많아요.” 사각이란 단어는 이제 그에게 꽤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자신이 설립한 ‘사각사갘’이란 브랜드 속에서 그가 생각하는 예술 활동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내가 예술적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더 적합한 게 뭐가 있을까 고민했어요. 공간을 연출하고 그 연출한 공간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제가 생각하는 예술 활동에 더 가깝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사각사갘은 다채로운 분야와 성격의 공간을 만든다. 상업 공간, 주거 공간, 촬영 세트장, 미식 공간, 음악 스튜디오 등등 그동안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사각엔 여러 의미가 있죠. 우선 인테리어를 디자인할 때 기본이 되는 사각형이란 포맷도 있고, 먹을 때 나는 소리도 있고요. 눈으로 보는 시각적인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미각과 후각도 건드릴 수 있는 그런 감각을 다루는 브랜드가 되고 싶다는 의미를 담았어요. 인테리어가 단지 사업 비즈니스 모델이 아닌 창작 영역이라고 강조하고 싶어요.”





예술과 공간의 교집합

그의 포트폴리오 가운데 눈에 띄는 건 전시 공간이다. 우란이상 시각예술연구 프로그램 <스토리 스케이프>를 통해 그는 전시 공간 연출에도 새롭게 도전했다. “우란문화재단 소장품을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시선으로 연구하고 실험하는 프로젝트가 흥미롭게 느껴졌어요. 마이클 울프의 작품 <인포멀 솔루션(Informal Solution)>과 서준원 도시공간 연구자를 하나의 공간에서 만나도록 하는 것이 제게 주어진 숙제였죠.” 마이클 울프의 작품 안에는 홍콩 사람들의 소시민적 일상이 담겨있다. 서준원 도시연구가는 골목골목을 찾아다니며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집했다. 이 두 개의 다른 세계를 정흥섭 작가는 어떻게 엮었을까? “마이클 울프의 세계가 평면적으로 펼쳐져 있다면 서준원 도시연구가는 수직적인 차원에서 도시를 바라봤어요. 두 사람의 수평과 수직의 개념을 전시 공간에 녹여내기 위해 실을 모티브로 가져왔어요. 선형은 시간을 상징하고 일종의 내러티브를 만들어주죠.” 구체적이며 실재적인 이야기, 개별적 서사에 집중한 ‘새로운 서울’의 풍경이 그렇게 탄생했다. 

가장 최근에 작업한 <Random Diversity 랜덤 다이버시티>도 사각사갘이 함께 협력한 프로젝트다. 김시영 도예가의 서가흑자 달항아리와 과학자인 천영환 연구자가 만난 흥미로운 주제의 전시가 열렸다. 천영환 연구자는 자신의 도구이자 실험의 주체인 AI와 로보틱 3D 프린팅으로 새로운 실험에 도전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달항아리였어요. 천영환 작가는 3D 프린팅을 활용해서 달항아리를 만들어냈죠. 김시영 작가가 전통예술이라는 장르를 대표한다면, 천영환 작가는 기술과학자로서 달항아리를 만드는, 예술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죠. 이 둘의 만남을 직관적으로 그리고 재미있게 풀어내고 싶었어요. 이 프로젝트의 중요한 목적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들을 조명하는 거였거든요. 그래서 천영환 씨를 정말 열심히 관찰했어요.” 정흥섭 작가는 달을 실제로 탐사하고 만나는 과정을 은유화해서 공간에 풀어냈다. “결국 달을 탐사해서 만난 건, 과학도 예술도 아닌 나 자신, 천영환이라고 하는 한 개인을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숨어있던 기억이 인공지능을 통해 컬러로 재탄생 하는 흥미로운 체험 활동으로 전시는 마무리된다. 모두가 그들 각자의 자신만의 ‘달항아리’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는 것. 





평범함과 엉뚱함에 스며든 예술

정흥섭 작가는 인테리어 디자인과 예술작품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는 소재의 평범성과 멋스러운 절제를 추구한다. “기존에 없던 방식으로 공간을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아요. 소재는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을 활용해서 말이죠. 그런 재료가 어떻게 조합되고 구성되었는지에 따라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그의 이력 가운데 흥미로운 것이 있는데 <입사거부서>라는 책을 번역한 일이다. 이 책의 저자인 쥘리앵 프레비외는 그에게 가장 큰 자극과 충격을 안겨준 아티스트다. “평범한 청년이 화가 나서 저지른 해프닝에서 시작된 사건이에요. 이 청년이 어느 날 입사 시험에서 비인간적인 질문과 인성 평가를 받고 화가 나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어요. 무려 7년 동안 스스로를 다중인격화 시켜서 조목조목 입사거부서를 2천여통 가까이 썼어요.” 이 잉여스러운 작품은 파리정치대학(시앙스 포) 학생들에 의해 전시되고, 그 해 인기상까지 수상하고 놀랍게도 유럽 예술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마르셀 뒤샹 예술가상까지 거머쥔다. 그리고 이 편지는 구직 문화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교육, 정치, 사회, 의료계까지 영향을 미친다. “제가 봤던 예술적 성과물 중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작품이었어요. 한국에도 알려보고자 직접 번역도 하고 그 내용이 책으로 출간되었죠. 한 사회의 예술적 성과물은 특정 예술가만의 것은 아니죠. 편지 한 통이 사회적 파급력을 갖게 되기까지 프랑스 사람들의 의식도 중요하게 작용했죠. 정치, 사회, 문화, 의료, 교육 등을 통틀어서 어떤 새로운 문제의식이 생겼을 때 그 문제의식을 포용하고 공유할 수 있는 능력, 전 그게 예술적 가치라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앞으로 꼭 이루고 싶은 구체적인 목표가 있는지 물었다. “다양한 영역에서 창의적인 의뢰인을 만나 작업의 최대치를 끌어내보고 싶어요. 인테리어, 전시 디스플레이, 작품 활동, 글쓰기, 음악 등 엉뚱한 조합의 장르를 개척해 나가고 싶어요.”

글: 김아름
사진: 황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