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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공간을 만드는, 신승렬 무대미술가





신승렬 무대 미술가의 이력은 조금 독특하다. 도예를 전공했으나 군대에서 우연히 본 책이 그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토착과 자생>이란 책에서 우리나라 무대 미술가 1세대인 이병복 선생님의 인터뷰를 읽게 되었어요. 당시에 제가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빠져있던 시기였는데, 무대를 채웠다 비우는 무소유의 철학이 유난히 마음에 와닿았죠.” 연극과 공연을 접한 적이 거의 없었지만 그걸 계기로 무대 디자인을 공부하게 되었다. 셰익스피어, 그리스 비극을 접한 나이 역시 이십대 중반. 무대를 접근하는 시각이 조금 다르기도 했다. 근본적인 공간에 대한 질문을 품고 건축과 디자인 분야를 다채롭게 탐색했다. 바우하우스 역시 그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그가 디자인한 무대를 보면 비워져 있다고 종종 말한다. 장식적이지 않으며 압축적이고, 미니멀한 무대를 보면 그의 이름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저는 좀 더 개념화된 작업을 좋아해요. 스토리라인이 뚜렷한 것보다는 추상적인 걸 좋아했어요. 어쩌면 공간이 주는 에너지 그 자체에 더 관심이 많았죠.” 



극장 밖으로 나아간 시적극장 


가장 실험적인 작품으로 기억에 남아있는 프로젝트는 무엇이었을까? 주저함 없이 우란문화재단에서 2018년도에 진행했던 <시적극장>을 꼽았다. “제목 그대로 시적인 상황을 공간에서 느낄 수 있도록 설정한 공연이었어요. 전자음악을 만드는 박승순 작가와 함께 ‘우리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공통의 것을 0에서 시작하는 것’을 오래도록 고민한 작업이었어요.” <시적극장>은 극장 속 극장에 가깝다. 객석과 무대의 위치가 계속 바뀌며, 관객들은 마치 산책하는 기분으로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때때로 상대방을 배우로 느끼기도 하고, 그런 경험이 어떤 순간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독특한 방식의 공연이었다. 여기서 두 사람이 품은 질문은 다음과 같다. “커다란 관습이 지배하는 극장 권력에서 우리가 해방될 수 있을까?”, “무대 너머 공간을 상상만으로 존재하게 만들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제는 좀 찾게 되었을까? 신승렬 작가가 이렇게 답했다. “얼마 전 '시적극장' 프로젝트를 함께하고 있는 혜림 작가님이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을 보내준 적 있었어요. 그 글로 질문에 대한 답을 대신하고 싶어요.” 그가 적어 보내준 구절이 오래도록 맴돌았다. “한 알의 모래에서 하나의 세계를 보고, 한 포기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너의 손바닥에서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담아라 – 윌리엄 블레이크.” 


<시적극장>은 이제 블랙박스를 벗어나 도심 혹은 자연 속에서 설치되어 관객들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첫 번째로 극장 안에서 시적인 순간을 맞이했다면, 두 번째는 지역을 기반으로 한 ‘시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항상 작업도 인생도 제 뜻대로 흘러간 적은 없지만 언젠가 ‘시적 극장’을 꼭 건축물로 세워보고 싶은 꿈이 있어요. 영구적인 조각 형태일수도 있고요. 제주도에 건축가 이타미 준이 만든 수·풍·석 박물관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누구든 와서 시적 공간을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도록 말이죠.” 마지막으로 <시적극장>은 역사성을 기반으로 하여 재탄생 하기도 했다. 최근 과거의 시간과 현재를 연결하는 작업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이루어졌다. 극장 밖으로 나아간 이 근사한 프로젝트는 계속해서 여전히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신승렬 작가는 이런 그림도 그려본다. 10년마다 열리는 뮌스터의 조각 프로젝트에도 세워보고 싶다는 꿈을 말이다. 






시간과 사유를 만드는 무대미술가


그에게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묻자 대지 미술로 유명한 크리스토 자바체프(Javacheff Christo)를 말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했던 작가인데 얼마 전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한번 작업을 시작하면 30년, 40년 오랜 세월에 걸쳐 프로젝트를 진행하세요. 국가를 상대로 늘 프레젠테이션하고, 성사될 때까지 찾아가서 설득해야 하는 작업을 하다 보니 그만큼 작업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죠. 이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만큼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 때문이에요. 이분의 작업을 늘 동경해왔고, 어떻게 보면 저의 롤 모델이기도 해요.” 







포스트 코로나 시대, 극장 예술은 쉽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다. 그에게 어떤 것을 고민하고 있는지 물었다. “저는 요즘 들어 감각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해요. 공간을 상상해서 만들고 분위기를 조성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기억을 상기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죠. 어떻게 하면 무한한 감각을 깨울 수 있을지에 대해서요.” 가장 최근 공연이었던 우란이상 레지던스연구 <방랑의 기술記述>은 약 6개월간 5명의 작가들이 함께 연구한 흥미로운 방식의 프로젝트였다. 한 개인을 둘러싼 서사와 사회적 환경이 예술가로서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무엇을 통해 균형을 찾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한. 작가들은 자신을 이루고 있는 삶의 경로를 추적하며 키워드를 찾아 서로 다른 예술 언어로 그것을 공유했다. 신승렬 작가에게 중요한 키워드는 노마드 였다. 작가는 2013년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작가로 <노마드 씨어터 프로젝트(The Nomad Theater Project)>를 진행하며 이동식 무대를 만든 적 있었다. “저는 노마드를 지속 가능한 에너지 형태로 봤어요.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그동안 작업했던 도면과 함께 유목민들의 이야기에 대해 썼어요. 제 자신을 돌아보고 리부트 할 수 있는 기회였죠. 그 어떤 시간보다 의미가 있었어요. 그동안 방랑했던 것을 기록하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에 대해 고민했으니까요. 또래 작가님들과 함께 작업을 하면서 새로운 자극도 당연히 받았고요. 그 자극이 예술에서 끝나는 작업이라기보다는 삶으로 이어지는 자극도 있었어요. 아티스트의 마음가짐이랄까요? 예술 안으로 밀려 들어온 삶에 대한 고민들을 방랑이라는 주제 아래 각자의 방식으로 기술해 나갔던 것 같아요.” 관객들은 작가들이 쓴 기록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책을 편집할 수 있는 시간을 경험했다. 그들 각자의 수 많은 이야기가 생성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승렬 작가에게 공연 예술이 가져다 주는 삶의 이로움 혹은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연극하기 라는 것은 어쩌면 관객이 보는 행위를 넘어 궁극적으로는 관객이 직접 연극하기를 체험하도록 만드는, 그래서 그 행위가 삶으로 연결되는 것이 공연 예술의 역할이 아닐까요? 때때로 관객들이 아티스트의 시각을 뛰어넘어 더 멀리 본다고 생각해요. 관객이 품고 있는 가능성은 무한합니다.” 

글: 김아름

사진: 황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