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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진국 미술평론가의 예술 산책




미술평론가란 누구인가? 이들은 미술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때때로 비평하며 우리가 몰랐던 낯선 세계로 안내한다. 새로운 시각으로 낯익은 것을 낯설게 바라보게 하는 사람들. 안진국 미술평론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판화 전공자, 미술평론가 되다 


안진국 미술평론가의 이력은 조금 특이하다. 그는 학부 시절에 이어 대학원에서도 판화를 전공했다. 그리고 한 편에는 문학에 대한 동경과 애정이 있었다. 우연한 계기를 통해 그는 글 쓰는 일의 매력을 발견했다. 근육을 기르듯 조금씩 쓰던 글이 비로소 빛을 본 순간은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이 당선되면서부터였다.당선작의 제목은 『제안된 공간에서 제안하는 공간으로』. “쉽게 말하면 미술관, 갤러리 형태의 공간을 넘어서 작가가 제안하는 새로운 전시 공간에 대한 고민을 담은 내용이었어요. 똑같은 작품을 거대한 공간에 설치했을 때와 반대로 조그마한 작업실에 놓았을 경우 그 느낌은 완전히 다르거든요. 작가가 작업실에서 온전히 감정을 느끼며 작업한 것들이 미술관에 가면 사라져버릴 수도 있어요. 작가들이 원하는 공간에서 전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아홉 장이 넘는 그의 이력서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판화다. 그는 오랜 시간 판화를 공부하며 이 분야를 연구해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점점 더 강하게 느꼈다. 어쩌면 그건 애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이다. 그가 바라보는 판화는 어떤 성격을 갖고 있을까? “판화는 노동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예술이에요. 완성해나가는 과정 자체가 너무 힘들다 보니까 마지막 결과물이 더욱 좋을 수밖에 없죠. 판화 작업하는 작가들을 인터뷰하고 옆에서 바라보면 완벽주의에 가까운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요. 판화는 작업 과정에 있어서 정확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하는 분야죠.” 그는 2019년 5월부터 2020년 1월까지 ‘우란이상 시각예술연구’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한국현대판화에 대해 연구했다. 그가 정성을 기울여 연구한 190페이지 분량의 연구집에는 우리가 몰랐던 판화의 신세계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1981 ~ 1996년 사이의 한국현대판화 


특히 그는 1981년부터 1996년 사이의 한국현대판화를 주목했다. 안진국 미술평론가는 이 시기에 일어난 한국현대판화의 변화와 사회적, 정치적, 미학적 환경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1981년도는 ‘88 서울 올림픽’이 확정된 해였어요.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의 사회상이 많이 변화했죠. 세계화, 민주화 투쟁, 경제 호황이 동시에 일어난 시기였어요. 무엇보다 1988년도에 갑자기 홍익대, 추계예대, 서울대 3개의 대학교에 판화과가 신설되었는데 저는 그것이 특이한 지점이라고 생각했어요. 해외로 유학을 떠났던 사람들이 귀국하면서 벌어진 일이기도 했죠.” 이 시기에 특별히 재조명 받아야 할 판화 작가가 있을까? 그에게 물었다. “한국 전위 예술의 1세대로 불리는 김구림 선생님도 원래 판화를 하셨던 분이세요.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판화 관련 단행본도 두 권 내셨었고요. 한국 최초의 현대적인 퍼포먼스를 행했던 강국진 선생님도 판화를 하셨었어요. 이우환 작가님의 작업에 영향을 줬다고 알려진 곽인식 선생님의 판화도 더 조명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보면 뭐랄까 명상적인 느낌도 있어요. 마지막으로 물방울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김창열 화백도 파리에서 장기 체류하면서 판화 작업을 하셨던 분이세요.” 


안진국 미술평론가는 판화를 시작으로 ‘기계기술예술’ 분야로 연구 주제를 확장하고 싶다고 했다. “이 분야에 대해 연대기적으로 정리해보고 싶다는 목표가 있어요. 어떻게 보면 이것의 가장 시초가 된 분야가 저는 판화라고 생각해요. 판화 인쇄술 이후에 사진, 영화예술, 디지털과 인터넷 예술이 지금에 와서는 VR, AR 등의 영역으로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죠. 판화를 출발점으로 이 모든 것을 차근차근 연구해나가고 싶어요.”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인공지능은 누구를 위해 예술을 창작하는가? 인공지능은 창작을 넘어서 예술을 감상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가? 더 나아가 인공지능이 감성을 가진 매개체로 발전할 수 있을까? 그는 이런 질문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새로운 화두를 풍성하게 던지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현재 이 주제에 대해 단행본의 형태로 글쓰기 작업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코로나 시대, 미술을 본다는 것의 의미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됨에 따라 미술을 감상하고 접근하는 방식 또한 변화하고 있다. 사회적 격리와 고립이 필수적인 시기에 점점 더 많은 미술관과 갤러리는 온라인 방식으로 전시의 방식을 전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진국 미술평론가는 예술 작품을 직접 실물로 봐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요즘 같은 시기에는 온라인으로 전시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만 작품을 직접 눈으로 본다는 것도 중요해요. 작품으로부터 받는 압도적인 감정은 온라인을 통해서는 느끼기 어렵죠.” 뛰어난 예술 작품을 보고 순간적으로 현기증을 느끼는 ‘스탕달 신드롬’을 언제 느껴봤는지 물었다. “강원도 원주에 뮤지엄 산이라는 미술관이 있어요. 거기에 가면 제임스 터렐의 작품을 볼 수 있는데, 작품의 규모가 아시아에서 최대로 크다고 알려져 있죠. 작가의 공간을 경험해보면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과 색채를 느껴볼 수 있어요. 그곳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흥을 받았어요. 그건 사진이나 온라인을 통해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에요.” 그가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아트 산책 코스가 있을까? “보안여관, 갤러리 팩토리, 사루비아 다방, 아트사이드, 진화랑을 천천히 둘러볼 수 있는 서촌 지역을 좋아해요. 거기서 조금 가면 만나볼 수 있는 부암동에 위치한 자하미술관도 정말 좋아요.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운치가 좋은 미술관이죠. 인왕산 끝자락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즐겨보고 좋은 전시도 감상할 수 있어요.” 


미술평론가에게 좋아하는 작가 단 한 명을 뽑아달라는 건 정말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겠지만, 그는 미얼 래더맨 유켈리스(Mierle Laderman Ukeles)라는 낯선 이름을 주저 없이 말했다. 미얼 래더맨 유켈리스는 ‘유지관리(Maintence)’ 예술을 통해 여성, 노동, 가치에 관한 논쟁적인 이슈를 만든 작가이다. “이 작가는 1973년 7월 23일 미술관에서 8시간 동안 안과 밖을 쓸고 닦으며 청소하는 작업을 했어요. 미술관은 평소 깨끗하게 유지해야 하는 공간이지만 정작 그 공간을 청소하는 분들은 보이지 않게 숨어서 일을 하시죠. 그분들의 노동이 없다면 공간이 유지될 수 없지만 마치 사람들은 청소하는 분들을 없는 사람처럼 대하곤 합니다. 소외받은 청소 노동자분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작업인 거죠. 작가가 ‘메인터넌스 예술을 위한 선언문 1969!’를 발표했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혁명 후, 월요일 아침에 쓰레기를 청소할 사람은 누구인가?” 이것은 ‘과연 혁명만이 중요한가?’, ‘혁명 후 그 뒤처리를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졌어요.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은 미술 관련 도서를 물었다. <현대미술강의>, <타인의 고통>이라는 두 권의 책을 말했다. “첫 번째 책은 현대미술의 변화 흐름에 관한 맥락을 파악하는데 정말 좋은 책이에요. 두 번째 도서는 미국 최고의 에세이 작가이자 평론가이며 뛰어난 소설가인 수전 손택이 쓴 책이에요. 그는 <해석에 반대한다>는 평론 모음집으로 서구 미학계에 논란과 주목을 받았는데요, <타인의 고통>은 그런 도발보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는 당위 때문에 타인의 고통이 고려되지 않는 방식에 관해 문제를 제기한 책이에요. 두 권 모두 제가 정말 좋아하는 책이에요." 안진국 미술평론가가 추천하는 책과 함께 혼자만의 고요한 아트 산책을 즐겨봐도 좋겠다.




글: 김아름

사진: 황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