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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의 크리에이터, 조수현




무대는 사람들에게 판타지와 이상을 실현시켜주는 공간이다. 초현실적인 장면, 꿈같은 순간, 압도적인 미장센. 어쩌면 그것은 때때로 예술 그 이상의 무엇이며 지극히 현실과 맞닿아있는 묘한 경계일지 모른다. 극장에서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조수현 무대 디자이너를 목련이 막 피어난 공간 속에서 만났다.


디지털 세계에 눈뜨다

조수현 디자이너는 어린 시절 엑스포, 올림픽 등 규모가 큰 행사를 바라보며 막연하게 그 세계를 디자인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무대 디자인을 전공으로 선택하게 되었고, 연극이라는 신세계를 알아가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변화가 찾아왔다. “어렸을 때부터 디지털 세계에 익숙한 편이었어요. 무엇이든 손으로 하는 것보다는 컴퓨터로 하는 것이 익숙하고 더 자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연극은 아날로그가 지배적인 장르였죠. 디지털 관련 분야에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면서 머지않아 이 장르가 공연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디지털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무대를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그렇게 시작됐어요.” 

그는 결심이 서자마자 유학길에 올랐다. 평소 좋아하는 팀 버튼 감독이 나온 칼아츠(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에 입학했다. 미국에서 영상 디자인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새롭게 배우기 시작했다. 단순히 배경막, 무대 장치로만 여겨졌던 영상 분야에 대해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극 안에서 존재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 이를테면 인물의 내면, 꿈, 환상, 추억, 기억 이런 것들은 연극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키워드죠. 그동안 주로 연극적인 언어를 통해서 이런 것을 해결했다면 이제는 그런 보이지 않는 요소를 아주 잘 표현할 수 있는 매체로서 영상이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죠. 극 안에서 그런 장면이 만들어지면 좋을 곳을 찾아서 영상을 시의적절하게 활용하는 방법을 학교에서 배웠고, 제가 그동안 만든 대부분의 작품에는 그런 고민이 잘 녹아져 있어요. 영상이 작품 안에서 또 하나의 언어로 자리 잡는 것, 관객들이 마음을 열고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디자이너

조수현 디자이너는 현재 익스터널이라는 회사의 크리에이티브 아트 디렉터 직함을 맡고 있다. 이 이름 안에는 그가 추구하는 가치들이 담겨 있다. “며칠 밤을 새우고 모든 작업의 과정 끝에 만나게 되는 ‘익스포트(export)’ 라는 버튼이 있습니다.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 버튼을 누르곤 하죠. 사람들은 1분짜리 영상 하나에 디자이너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는지 사실 짐작하기 어려울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버튼을 누르는 순간 제가 만든 것이 세상 밖으로 나가는 거죠. 디자이너의 삶이란 결국 계속해서 제 안에 있는 것으로 바깥으로 내보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익스터널이란 말은 방향성과 운동성을 지닌 건강하고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단어죠.” 그의 말마따나 무대∙영상 디자이너가 재해석한 세계를 통해 관객들은 전혀 다른 시각적인 충격과 감동을 받곤 한다. 뮤지컬 <헤드윅>은 짧은 영상 안에 얼마나 많은 노력과 노고가 담겨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모두의 기억 속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The Origin of Love’의 한 장면을 위해 그는 3개월간 공을 들였다. “종이 인형으로 스톱 모션을 시도했어요. 헤드윅의 질투와 사랑을 뛰어넘는 원초적인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플라톤의 <향연>의 내용을 접목시켰죠. 당시에 1초당 12장의 사진을 찍어서 영상을 만들었는데 자세히 보면 <향연>을 찢어서 만든 디테일이 숨어있어요. 그런 노고를 알아봐 준 관객들로부터 좋은 피드백을 받았어요. 저는 결국 그런 색다르고 철학적인 시도가 작품 전체의 완성도를 끌어올린다고 생각해요.” 


가장 실험적이고 새로운 경험

늘 새로운 시도를 추구하는 그이지만 우란문화재단과의 작업은 더 각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짧은 기간 동안 선보여 관객들의 반응을 보고 작품을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는 트라이아웃(Try-Out) 공연을 선보이는 우란이상 공연예술개발 프로그램은 실험적인 공연에 목말라 있던 그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되어주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의 전도사로 불리곤 해요. 그만큼 사람들에게 좋았던 경험에 대해 자랑을 많이 합니다(웃음). 상업적인 영역에서 시도할 수 없었던 것들을 마음껏 도전하고 실험할 수 있는 기회거든요. 서로 토론하며 공연을 만들 수 있고 그 결과에 대해 상업성을 바로 판단하지 않는 것에서 오는 자유로움을 만끽했죠. 마치 대학교 시절로 돌아간 듯 아주 오랜만에 진짜 작품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특히 2019년 1월에 올린 뮤지컬 <빠리빵집>에서 그는 기존에 볼 수 없었던 기발한 아이디어를 무대에 접목시켰다. 관객들이 마치 자동차나 트램을 타고 이동하면서 장면을 보듯 턴테이블처럼 회전하는 객석을 만든 것. 업계에서도 이례적인 굉장히 센세이션한 시도였다. “객석에 50명을 앉힐 수 있는 무대 구조였어요. 과연 누가 투자를 할 수 있을까 싶은 과감한 시도였죠. 트라이아웃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은 상업적으로 불가능한 도전도 망설이지 않고 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어요.” 






나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들

그는 언제나 작품 속에서 영감과 아이디어를 얻는다. “누군가는 이 일을 예술가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저는 철저하게 디자이너라고 생각하고 일을 해요. 연출가 혹은 작가가 꿈꾸는 이야기나 공간을 만들어준다는 마음을 갖고 있어요. 개인의 취향이 작품을 압도하는 디자인을 지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이 주는 인상이 언제나 디자인의 원동력이 되어주죠.”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그는 지금까지 11개 작품의 무대 디자이너로, 30여 편의 영상 디자이너로 포트폴리오를 쌓아왔다. 그 모든 것을 꿰뚫은 한가지 톤으로 규정짓지 않고 작품이 가진 고유의 색깔을 다채롭게 표현해왔다.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준 많은 사람들이 있다. 영화감독 웨스 앤더슨, 팀 버튼, 히치콕, 그리고 설치미술가 제임스 터렐. 인생의 전환점이 생길 때마다 그에게 영감을 준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 제임스 터렐을 정말 좋아해요. 미국에 있을 때도 몇 번 전시를 봤었는데, 단순히 작품을 관람하는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세계를 함께 경험하고 체험하게 되는 특별한 기회였죠. 어쩌면 그런 이머시브(Immersive) 전시와 공연이 미래형 콘텐츠가 될 수 있다고 깨닫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어요.” 


고전과 테크톨로지가 만나는 순간을 꿈꾸며 

그에게 관객으로서 기억에 남는 극단이나 예술가가 있는지 물었다. “우스터 그룹이라는 아주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는 극단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대중적이면서도 실험적인 작업을 하는 로베르 르빠주는 제가 닮아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요.” 마지막으로 그에게 꿈처럼 느껴지는 작품이 있을까? 어쩌면 그는 이미 꿈을 이뤘는지도 모른다. 2015년 참여한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은 마치 거짓말처럼 정말로 하고 싶었던 작품을 만난 경우였다. “뉴욕에서 우연히 이 공연을 보고 무언가 한대 맞은 것만큼의 충격을 받았어요. 무대와 영상 모든 것이 완벽한 공연이었죠. 이런 작품을 한번 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정확하게 한국에서 일주일 뒤에 연락을 받았어요.” 조수현 무대 디자이너는 앞으로 이런 꿈을 그려본다. “재작년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Royal Shakespeare Company, RSC)에서 인텔(Intel)과 함께 협업으로 <템페스트>를 무대에 올렸어요.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색다른 공연이었죠. 저도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고전을 기반으로 테크놀로지의 끝단까지 가보는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VR, AR, AI 등등 가능한 많은 상상력과 다채로운 기술을 동원한 작품을 꼭 한번 해보고 싶어요.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국내 최초의 가장 실험적이고 진보적인 공연의 주인공이 그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글: 김아름

사진: 황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