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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게 건네는 질문, 김제민 미디어 아티스트





상상하는 능력, 본능에 우선하는 이성, 그리고 창조하는 힘. 고차원적인 지능을 습득한 이래로 인류가 독점해온 것들이다. 인간은 이를 통해 규칙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고, 예술이라는 추상적 세계까지 구축했다. 그러나 그동안 당연하다고 여겼던 오랜 믿음은 인공지능이 등장한 현재 의심에 직면했다. 무엇이 지성이고, 어디까지가 인간의 영역일까. 오직 인간만 지성을 소유해야 한다는 전제부터가 오류인 것은 아닐까. 연극 연출가이자 미디어 아티스트인 김제민의 작품 활동은 그 답을 추측하는 힌트가 될지도 모른다. 



열린 대화의 목적 


김제민 작가는 지난 2018년 우란문화재단의 레지던스연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그가 발표한 결과물은 관객 참여형 프로젝트였던 <I QUESTION>. 참여자가 인공지능 ‘I QUESTION’에게 사진을 전송하면 이미지 분석을 마친 후 견해를 말했다. 지금까지 본 사진 중 몇 번째로 마음에 든다는 코멘트까지 표시됐다. 객관적인 우열이 없는 사진을 두고 호감도를 서열화한다는 사실은 인공지능이 자의적인 판단 기준을 갖췄다는 의미가 된다. 정보를 찾아주거나 뉴스를 틀어주는 것처럼 정답이 있는 명령을 수행하는 인공지능과는 조금 다르다. “덜 똑똑했으면 했어요.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명백한 답을 내놓는 게 아니라 정해진 답이 없는 문제에 관해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는 인공지능이길 원했어요. 점진적인 진화도 필수 조건이었죠. 관객 참여를 통해 쌓인 데이터를 학습하여 답이 고정적으로 나오지 않는 시스템을 갖추었으면 했어요.”


하지만 프로젝트 실행이 처음부터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연출과 미디어 아트 경력이 있는 그에게도 인공지능을 동원하는 프로젝트는 ‘초행길’이었을 뿐이다. 개발자가 합류해 그동안 구상한 바를 하나둘 현실화해 나갔지만, 김제민 작가 스스로 극복해야 할 난관은 여전히 많았다. “모든 문제는 인공지능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하다는 데서 시작됐어요. 제가 인공지능을 직접 개발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기술적 이해를 인문학적 이해로 전환해 주는 역할을 하려면 그래도 시스템의 원리를 파악해야 했죠. 인공지능에 관한 공부가 곧 작품 활동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우란문화재단과의 프로젝트에서 그가 선보인 ‘I QUESTION’의 버전은 1.0이었다. 현재까지 총 5개의 정식 버전이 나왔다. 모두 사진이라는 대상을 다루면서도 대화 주제는 각기 다르다. 행복에 대해 다루기도 하고,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가장 최근에 나온 6.0 버전은 ‘기초과학 연구원’에서 이미지 소스를 제공했다. 나노 바이오 관련 분야의 연구 사진을 제시하면서 얼마나 예술적인지 평한다고 한다. “1.0부터 6.0까지 모든 버전이 열린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아요. 지금 인간의 삶에 직접적인 편의를 제공하는 인공지능은 아니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기회를 ‘I QUESTION’ 시리즈를 통해 마련하고 싶었어요. 사람들에게 인공지능에 대한 인식을 물었을 때 ‘지능은 있지만 마음이 없는 존재’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럼 마음은 대체 뭐죠? 우리는 마음을 무엇이라고 정의하고 있을까요? 결국 전부 사람에 관한 탐구더라고요.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과정이죠.”







시선이 결정하는 관계 


김제민 작가는 ‘I QUESTION’을 작업하며 만난 김근형 AI 개발자와 함께 미디어아트 그룹 ‘슬릿스코프’를 결성했고, ‘아이퀘스천’에 이어 춤추는 인공지능 ‘마디’, 공간을 생성하는 ‘루덴스토피아’를 만든 바 있다. 인공지능의 어림잡을 수 없는 가능성을 목격한 그는 사유의 규모가 더욱 거대하면서도 실험적인 시도를 해보기로 한다. 텍스트의 세상 안으로 AI를 투입하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김제민 작가는 그중에서도 가장 정의하기 어려운 문학 장르인 시를 주목했다. 인공지능 ‘시아’가 세상에 나온 배경이었다. 


‘시아’는 지난 11월 상연한 <시작하는 아이>를 통해 대중에게 처음 공개됐다. 공연 후반부엔 관람객이 제시하는 키워드로 시를 지어내는 시간이 있었는데, ‘25살’처럼 어떠한 맥락도 없이 입력된 키워드만으로도 시를 완성했다. 지극히 ‘시스러운’ 문장 구사보다 놀라웠던 점은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시적 정서였다. 25살 시절을 경험한 사람만 꺼낼 수 있을 법한 이야기를 소프트웨어로만 존재하는 인공지능이 하고 있었다. 비록 인간이 아니라고 해도 이야기만 나눌 수 있다면 시를 지은 의도에 관해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반면 조금 서늘한 감정이 동시에 들기도 했다. 인간이 더는 창작 활동을 전유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인공지능에 창작하는 능력이 필요하겠냐는 질문에 김제민 작가가 답했다. “기술은 언제나 수용자에 따라 활용의 정도가 결정되곤 했어요. AI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창작 능력의 당위성을 따지기엔 아직 이른 것 같아요. 지금은 인공지능을 대하는 시선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AI는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지만, 우리는 AI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잖아요. 결국 인공지능을 바라보는 인간의 욕망에 따라 진화의 방향이 결정될 겁니다.”


다만 그는 막연한 공포를 가질 필요까지는 없다고 했다.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기사가 펼친 대국이 적잖게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기계와의 싸움에서 결국 인간이 패배했다는 식의 기사가 연일 쏟아졌죠. 하지만 알파고가 둔 정석에 없는 수는 이후 새로운 바둑 전략 연구의 중요한 동기가 됐어요. 더욱 풍성하고 다채로운 두뇌 스포츠로 발전할 동력을 얻은 셈이죠. 바둑의 다른 말을 혹시 알고 계시나요? 손으로 나누는 대화라는 뜻의 ‘수담’이에요. 승패보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나누는지에 더 관심을 둔다면 인공지능과 인간의 이상적인 관계를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정지하지 않는 예술


이처럼 인공지능을 통한 작품 활동에 몇 년째 매진하고 있지만, 김제민 작가에겐 사실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직업이 한 가지 더 있다. 그는 서울예술대학에서 연극을 가르치는 교수로도 활약하고 있다. “교육자로서의 직업 윤리는 또 다른 문제 같아요. 상담할 때마다 학생 한 명 한 명이 독립된 우주로 느껴져요. 제가 알고 있는 세상 편에만 서서 그들을 대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계속 ‘새로 고침’ 버튼을 누르고 있습니다. 한 해 동안 잘 해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교육과 작품 활동에 매진하며 달려온 2021년에 이어 2022년에도 크고 작은 계획이 가득했다. 김제민 작가는 인공지능 ‘시아’의 능력을 더 다양한 방법으로 도출해낼 생각이다. 창작한 시를 모아 시집을 발간하고, 시극까지 쓰게 하여 무대를 구성해 볼 참이다. 구체적인 사항을 모두 물어볼 순 없었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는 다가오는 새해에 아티스트로서의 세계관을 최대치로 펼쳐 보이려는 듯했다. 


그에게 던진 마지막 물음은 인터뷰를 통틀어 가장 열린 질문이었다. 어떤 삶을 살고 싶냐는 막연한 질의에 그는 영화 이야기로 답변을 대신했다. “쥬세페 토르나토레가 감독한 <피아니스트의 전설>이 생각나네요. 엔니오 모리코네가 음악을 담당해서 더 좋아하게 된 영화죠. 작품 내에서의 설정이 참 독특해요. 이민선에서 태어난 아이가 부모에게 버림을 받은 후 배 위에서 성장해요. 한 번도 육지를 밟아본 적이 없고요. 평생 선상에 놓인 피아노를 연주하며 자신의 삶을 표현하죠. 결국 이민선에서 벗어날 기회가 오는 데도 하선을 포기해요. 그리고 그곳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예술가로서 공감이 많이 가는 대목이에요. 늘 같은 공간에 있지만, 절대 정주하지 않는 삶. 어쨌든 배는 계속 움직이니까요."


글: 이재현

사진: 황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