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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으로 마주한 본질, 이윤정 안무가





안무가에게 춤이란 무엇일까. 세상과 대화하는 언어적 수단일 수도 있고, 매 순간 신체의 한계에 부딪혀야 하는 자발적 고행일 수도 있다. 이윤정의 삶 절반 이상은 춤으로 채워져 있다. 몸을 움직여 자신을 직시하며 세상을 이해한다. 안무가이자 ‘댄스 프로젝트 뽑끼’의 예술감독인 그에게 춤은 삶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우란이상 프로그램에 참여해 춤 공부에 한창이던 이윤정 안무가를 만났다. 



낯설어야 보이는 것들


이윤정 안무가와 우란문화재단의 인연은 이번이 두 번째다. 2018년에 시작해 2019년으로 이어진 우란이상 레지던스연구에 참여해 <WALK ON>을 발표한 바 있다. 몸에 관한 연구를 통해 사회 불평등을 추적하던 그는 ‘네 번째 손가락’을 주제로 우란이상 해외연구지원 공모에 신청했다. 쓰임새가 불분명하고, 운동성이 미약하지만 결코 퇴화하지 않는 손가락. 반지를 끼우는 특별한 손가락인 동시에 결의에 찬 단지(斷指) 의식에선 희생되곤 하는 약지. 네 번째 손가락으로 대변되는 신체 내 불균형을 주목하면 사회적 불공평까지 들여다볼 수 있겠다는 취지로 연구 주제를 설정했다. 


애초엔 독일과 에스토니아에서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었다. 과거 사비를 들여 체류하며 연구 활동을 했던 나라다. “2019년에 2달 동안 머물며 세포, 근육 등 피부 아래의 것에 관해 공부했어요. 내가 누구인지 물질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이죠. 낯선 곳에서 축적한 경험은 분명 인간을 한 단계 성장시킨다고 봐요.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귀국한 후 창작한 작품들이 평단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고요. 독일과 에스토니아를 재차 방문하면 더 심도 있는 연구를 할 수 있을 듯했어요. 현지 아티스트들과의 교류와 워크숍 참여를 통해 주제를 구체화할 생각이었죠.”


하지만 지원 사업에 선발된 이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닥쳤다. 코로나-19로 인해 국내에서 연구하는 방향으로 선회해야 했다. 이윤정 안무가는 유럽에서의 연구를 모방하는 대신 한국에서만 실현 가능한 연구법을 찾았다. 마침 약 15년간 수련한 기공을 통해 신체적 단련은 정신적 영역과도 연결된다는 것을 느끼고, 동양 전통의 수행법에 관한 관심이 점점 커지던 참이었다. 그는 가장 먼저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헤아렸다. “평온한 시간, 나를 내려놓는 휴식, 그리고 외부와 차단된 한적한 공간이 절실했어요. 강박적인 시간과 의무, 소음으로부터 분리되어 나 자신을 독대할 수 있는 곳이요. 그래서 6월부터 8월까지 거창의 명상원과 합천 해인사, 그리고 제주도로 자리를 옮겨가며 시간을 보냈죠. 산속에선 명상을 하고, 바다에선 수면 아래로 침잠하는 프리다이빙을 했어요. 춤은 결국 내면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어 자신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요. 명상과 다이빙은 미지의 영역으로 향한다는 점에서 춤과 비슷한 면이 있어요.”






사전 연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이윤정 연구가는 9월부터 본격적인 프로젝트 구성에 돌입한다. 연구 공간은 우란문화재단 내에 있는 ‘우란3경’, 함께 작업할 동료는 드라마터그 김재리, 시각 예술가 최윤석, 사운드 디자이너 홍초선이다. “세 분은 서로 잘 모르는 사이예요. 각 분야에서 뛰어난 아티스트를 섭외하는 동시에 익숙하지 않은 관계로 맺어진 팀을 구성하고 싶었어요. 서로를 바라보고, 파악하는 과정 역시 11월에 공개될 창작물에 어떤 형태로든 반영될 테니까요. 어떤 결과물인지도 중요하지만, 최종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도 중요하죠. 춤과 수행이 그런 것처럼요.”



가난의 역설 


이윤정 안무가의 삶 역시 수행이라는 단어와 포개어진다. 18살 무렵, 끝이 보이지 않는 미지의 영역으로 항해를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맹목적인 전진과 원점으로의 회귀를 반복했다. “대학에서 현대 무용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는 안무를 전공했어요. 어려서는 막연하게 춤만 잘 추면 안무가가 되는 줄 알았죠. 대학원에서도 은연중에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안무법을 바라곤 했어요. 이후 입시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고, 각종 의뢰를 소화하며 생계를 유지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슬프고 괴롭더라고요. 마음이 춰야 춤인데, 그러지 못했으니까. 얕은 지식으로 누군가를 가르치고 있다는 게 부끄럽기도 했고요. 그때 모든 일을 그만두고, 차라리 가난해지기로 했어요.”


하지만 자신을 담보로 건 선택은 버거운 시간을 동반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주변의 시선도 결코 곱지 않았다. 그렇게 10여 년을 고생한 끝에 이윤정 안무가는 다시 제대로 해보자는 결심을 한다. 우선 아티스트로서의 삶을 유지하려면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사회 보편적인 이야기를 꺼내 꾸준하게 담론을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었다. 예술가로서 약속을 이행하고, 성장을 증명하는 모습 역시 보여주고 싶었다. 2012년에 시작된 <이윤정 춤 이어 추기>가 세상에 나오게 된 배경이다. 


<이윤정 춤 이어 추기>로 장기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얼마 후, 그는 아티스트로서의 삶에서 다시 한번 전환점을 맞이한다. “2014년에 영국의 안무가 조나단 버로우(Jonathan Burrows)가 방한해 워크샵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배운 것들이 지금까지의 작업과 예술관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안무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나가는지 이야기하더라고요. 리듬, 시간, 공간을 이해하고, 아티스트로서 옳은 태도를 함양하라고 강조하면서요. 그런데 1주일간의 교육을 마치면서 했던 말이 잊히지 않아요. ‘지금까지 배운 걸 다 잊어!’라는 말을 남기곤 떠났거든요. 결국 나는 내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죠.” 조나단 버로우와의 만남은 이윤정 안무가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75분의 1초>, <1과4, 다시>, <점과 척추 사이> 등이 무대에 올랐고, 이윤정은 평단과 대중에게 이름을 알려 나갔다. 






관계를 향한 춤


이윤정 안무가는 2019년 선보인 <설근체조>를 기점으로 다시금 10년 단위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사이’라는 키워드를 포착했던 전 과정에서 한발 더 나아가 ‘몸과 사회’의 관계를 주목하려 한다. 우란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 중인 ‘네 번째 손가락’도 그 연장선 상에 있는 셈이다. “커리어를 시작할 때와 가장 달라진 점이 있다면 관계성에 대해 더욱 포괄적인 고민을 하는 것 같아요. 자신과 타인, 개인과 사회 사이에 형성되는 관계에 관심이 가죠. 어린 시절부터 관계에 예민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단적인 예로 수없이 많은 영화 중에서도 <E.T.>를 좋아하는데, 영화 자체의 이야기보단 가족과 함께 봤다는 기억 때문에 저에겐 아직도 최고의 작품으로 남아 있거든요. 어쩌면 그로부터 수십 년 후, 춤을 통해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마음이 든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윤정 안무가는 대화를 나누는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공부’라는 단어를 수십 번이고 끄집어냈다. 한 분야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전문가에게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공부는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 학습한다는 뉘앙스도 내포하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자신의 전문성을 스스로 부정할 수도 있는 어휘다. 그러나 이윤정 안무가에게 공부의 의미는 조금 달랐다. “단련을 통해 단단해지는 절차가 공부라고 생각해요. 신체와 정신, 그리고 자신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까지도요. 평소 참선을 하는 스님들을 보면서 ‘왜?’라는 의문을 가졌어요. 그런데 이번 연구를 위해 해인사에 머무는 동안 답을 알아냈어요. 수행이 수단이 아닌 목적인 사람이더라고요. 열반의 경지를 공유할 순 없지만, 열반에 이르려고 단련하는 과정을 보여줄 순 있잖아요. 춤이 이해하기 어려운 예술이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춤이 향하는 목적지보단 그 여정을 살펴보면 ‘나의 이야기’처럼 와닿을 거예요. 저를 포함해 우리 모두 어딘가에서 무엇인가를 공부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글: 이재현

사진: 황인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