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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으며 나누는 소통, 강은경 식경험 디자이너





인류의 역사는 음식의 역사이기도 하다. 구전 설화부터 시작해 굵직한 사회, 문화적 사건의 현장엔 언제나 음식이 있었다. 음식은 개인의 역사이기도 하다. 연인과의 만남, 친구와의 화해 등 개인의 삶 면면에도 따뜻한 밥이 함께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음식은 타인 그리고 세상과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수단이 되곤 한다. 인간과 음식 사이의 상관관계를 추적하는 사람이 있다. 강은경 식경험 디자이너에게 음식이란 사회적 관계의 본질을 파악하는 중요한 실마리다. 



음식이라는 언어


음식 평론가, 푸드 칼럼니스트. 최근 몇 년 사이 미디어를 통해 부쩍 자주 접하게 된 음식 관련 직군이다. 그들이 음식이라는 결과에 집중한다면, 식경험 디자이너의 시선은 엄연히 다른 영역을 향한다. 맛 자체보다는 맛이 유발하는 감정에 주목해 자기의 언어로 표현하도록 유도하는 게 그의 활동 중 하나다. 음식을 준비하고 먹는 과정에서 더욱 긍정적인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환경을 설계해 주는 것도 그의 역할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맛에 관한 감성은 더욱 풍부해지고,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은 훨씬 커진다.



다소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이를 이해할 단서는 그의 빼곡한 활동 이력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난해 청소년을 대상으로 열린 교육프로그램 <음식과 콘텐츠>에선 젤리의 맛을 사랑을 떠올렸을 때 연상되는 단어로 설명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맛있다’와 ‘맛없다’에 머무르던 설명은 이내 ‘새큼하다’, ‘달달하다’처럼 다양한 어휘로 표현됐다. 참가자는 이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맛의 세계관’이 확장되는 경험을 한다. 


한편 그가 펴낸 책 <나는 왜 이렇게 먹을까>에선 독자가 주로 무엇을 먹는지 나열하게 한다. 좋아하는 식재료와 그렇지 않은 것을 분류하다 보면 자신을 더욱 객관적으로 마주할 기회가 생긴다. “음식에 대해서 각자가 느끼는 감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어요. 누군가의 추천이나 별점 없이도 주관에 따라 음식을 선택하고 즐길 수 있어야 하죠. 이건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과 같은 맥락이에요.” 




지난 프로젝트 중 하나인 ‘무 자수놓다’를 표고버섯으로 시연하는 모습









강은경 식경험 디자이너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이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 시각 디자인과 의상 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영국으로 건너가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며 커리어를 다져 나갔다. 하지만 경력이 쌓일수록 매너리즘에 젖어 들었다. 무기력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그 일을 더 해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어요. 많이 지친 상태였죠. 그러다가 시골에 있는 농장으로 쉬러 떠났어요. 우울함을 극복하고 일단 사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한적한 농장에 머무는 동안 그는 뜻밖의 경험을 한다. 땀 흘리고 농장 일을 하며 잃었던 생의 감각을 되찾았다. 시골 생활은 점점 길어져 인근 학교에 석사 과정을 등록하기에 이른다. 이때 처음으로 음식의 역할에 대해서 고찰하기 시작했다. 매일 동료들과 함께 갖은 식사 자리가 어느 활동보다도 유의미하게 다가왔다. 


마리예 보헬장(Marije Vogelzang)의  스튜디오에서 일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레스토랑 겸 디자인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이팅 디자이너(Eating Designer)였다. 마리예 보헬장의 활동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던 앞날에 명쾌한 방향을 제시했다. 비자 문제로 석 달 남짓한 기간의 인턴 생활인 데다 나이는 서른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고민할 시간도 아까웠다. 


“인턴들의 주요 업무는 식사 준비였어요. 여럿이 밥을 준비하고 먹는 동안 일어나는 일이 인생을 흔들어 놓을 만큼 흥미로웠죠. 한정된 돈으로 장을 본 후 여러 식재료를 활용해 요리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게 됐고요. 식사를 둘러싼 일련의 과정이 엄청난 공부 거리이자 재미있는 일과였어요. 매일 점심이 강렬한 식경험이었죠.” 한 그릇의 밥이 사람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또한 생겼다. 농장에서 했던 생각이 드디어 명료해졌다. 새로운 진로로 발을 들일 용기를 인턴십을 통해 얻은 셈이었다.



차 한 잔의 마력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식경험 디자이너라는 새 직함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활동 무대를 넓혀갔다. 공립 기관이나 식품 회사 등에서 식경험과 관련된 워크숍과 강연을 펼쳤다. 생경한 장르가 차츰 지지와 공감을 얻기 시작했다. 그사이 ‘스몰바치 스튜디오’를 설립해 디자인과 출판 인프라까지 구축했다. 여러 단체와 큼직큼직한 프로젝트를 함께 수행하며 강은경이라는 이름과 스튜디오 명을 동시에 알렸다. 


암스테르담에서 돌아온 지 10년이 지난 2021년. 강은경 식경험 디자이너는 현재 우란문화재단과 함께 <T for 2>라는 커다란 프로젝트를 벌이고 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나눠 입체적으로 기획된 이 프로젝트의 소재는 차(茶). 그중 지난 2월 8일 막을 내린 오프라인 프로그램 <TEA Dynamics>엔 총 서른 팀이 참가했다. 차탁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차를 마시는 동안 벌어지는 현상을 들여다보는 관객 참여형 실험이었다. 




민덕영 작가의 차탁과 <T for 2>의 도구들 ©강은경 



“다도를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위계가 작동하지 않도록 낯설고 불편한 도구를 준비했어요. 두 사람 사이의 거리도 적정 거리 이상으로 떨어지도록 자리를 설계했어요. 두 사람이 소통과 협력을 통해 차 마시기를 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죠. 서로 가까워지고 당기는 듯한 제스처가 나오리라고 예상했어요.” 


결과는 예측을 한참 뛰어넘었다. 카메라와 조명, 마이크까지 설치해 불편할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사례가 속속 등장했다. 녹음과 녹화가 되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대화에 깊게 빠져들었다. 어떤 조는 차를 내리는 데 성공하자 기쁜 얼굴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술잔처럼 찻잔을 부딪치는 팀도 있었다. 실험은 차의 존재 가치가 맛이나 예법보다 사람 간의 거리를 좁히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와 서로 가까워지려는 본능이 차를 통해 발현된 것이다. 



  

<T for 2> 오프라인 프로그램 설계 드로잉 ©강은경 



차의 힘은 온라인으로 공간을 옮겨 <pracTEAce us>를 통해서도 구현될 예정이다. 오는 6월, 플링커 Plinqer와 함께 개발한 애플리케이션을 선보인다. “차를 마시는 행위는 현실이지만, 메타버스 기술이 도입된 온라인 플랫폼은 현실과 가상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또 다른 세상이에요. 보수적인 소재가 진보적인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설정부터 재미있어요. 차를 마시지 않는데도 차를 마실 때와 동일한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어요. 맛이나 냄새를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청각적인 효과로 대신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를 나누고 있어요. 오프라인 못지않게 의미 있는 실험이 될 거예요.”



밥의 재발견 


오랜 외국 생활은 고국의 식문화를 전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한식을 경험할 수 있는 저변에 유례없이 넓어진 지금, 외국인이 우리의 음식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징이 무엇일지 물었다. 


“마리예 보헬장에게 어떻게 이팅 디자인을 할 생각을 했는지 물어본 적이 있어요. 네덜란드는 역사와 종교적 배경 때문에 청빈한 식생활이 미덕인 나라여서 음식과 사람의 거리가 가깝지 않다고 했죠. 그래서 음식을 오브제로 활용할 수 있다고 말한 기억이 나요.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는 거죠. 반면 한국은 대척점에 있는 나라 같아요. 사람과 음식이 매우 가까워요. 가만두지 않고, 마음껏 가지고 놀죠. 외국 음식이 한국으로 들어오면 어떻게 변형될지 몰라요. 현지화를 넘어 제3의 형태로 개발되죠. 프랑스인들이 ‘인절미 크루아상’, ‘뚱카롱’ 같은 음식을 상상이나 해봤을까요?”



그는 애피타이저, 메인 디쉬 순으로 제공되는 서양 요리와 비교하며 순서에 대한 특성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여러 반찬을 늘어놓고 규칙 없이 먹는 모습도 특별해요. 자신이 좋아하는 조합으로 쌈을 만들고, 밥 위에 반찬을 올려 먹기도 하죠. 그 어느 나라의 식문화보다 자기 주도적이고, 매번 변화무쌍한 맛을 만들어낼 수 있어요. 외국인으로선 무척 생소하지만 소중한 식경험이 될 거예요.” 



식경험이라는 세계가 더욱 궁금해진 나머지 음식을 통한 소통 과정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부탁했다. 그는 영국 영화 <시와 점심>을 추천했다. 크리스토퍼 레이드(Christopher Reid)의 시를 대사로 활용한 작품으로, 과거 연인이었던 두 남녀가 자주 찾던 레스토랑에서 재회해 대화를 나눈다. “15년이 흘러 레스토랑은 필요 이상으로 세련되어 버렸어요. 괴팍한 성격의 알란 릭맨은 독신으로 늙어버렸고, 엠마 톰슨은 성공한 작가와 결혼했죠. 둘은 각자의 성격에 맞는 음식을 주문하곤 시적인 대화를 펼쳐나가요.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주옥같아 귀를 뗄 수 없는 동시에 식경험적인 측면에서도 눈을 뗄 수 없는 영화예요.”



강은경 식경험 디자이너는 <T for 2> 이후의 계획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올 하반기에 그동안 벌인 프로젝트와 창작물을 갈무리해 글과 함께 책으로 담아낼 생각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작업물을 음식 메뉴처럼 주문하고 경험하는 ‘식경험 디자인 바’를 만들어 관객과 마주하는 광경을 그려보기도 한다. “상상만 하던 프로젝트들이 현실이 될 때면 놀라워요. 어떤 형태의 일이든 아직 전례가 없기 때문에 매번 새롭죠. 그래서 어렵지만, 역설적으로 새로운 여정을 펼쳐나갈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지겨운 걸 정말 못 참는 성격이거든요.”


글: 이재현

사진: 황인철